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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과학&미래

과학에 염증 내는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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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들어왔다. 반장의 인사를 받은 그는 곧바로 칠판으로 돌아섰다. 진초록 칠판 왼쪽 맨 위부터 분필이 춤을 췄다. 교실 뒤쪽 아이들이 겨우 알아볼 정도의 작은 글씨가 아래로, 또 오른쪽으로 칠판을 채우기 시작한다. 새 분필이 몇 차례 등장하고, 칠판 오른쪽 맨 아래까지 글씨가 가득 찰 때 즈음 종이 울렸다. 수업시간 50분 동안 선생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날아가는 듯한 판서를 받아적느라 헉헉댔다.

30여 년 전 체험했던 고교 생물 수업 시간 얘기다. 받아적기라도 하면 머릿속에 들어갈 거라는 선생님 나름의 배려였을까. 하지만 필자에게 생물은 그렇게 힘들고 지겹고 어려운 과목이었다. 생물이 새롭게 다가온 건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 뒤였다. 직업 덕에 세계적 유전자가위 학자를 만나 연구 얘기를 듣고, ‘생물’을 쉽게 풀어쓴 책(『하리하라의 바이오 사이언스』)을 접하면서였다. ‘생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니…’ 생물은 ‘나’의 이야기였다. ‘인류의 미래가 이렇게도 바뀔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20세기 과학 수업 얘기를 꺼낸 이유는 올해 수능 때문이다. 국어 31번 지문이 만유인력을 얘기하는 내용이었는데, ‘올해 수능 중 가장 어려웠던 문제’라며 화제가 됐다. 학생들 대부분이 ‘멘붕’이 왔다는 이 문제를, 출제위원들은 왜 냈을까. 수능 국어시험에서 과학 지문이 나온 건 올해가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배운 적이 없는 지문도 추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낸 문제라고 했다. 고점자들의 변별력을 위해 일부러 만든 ‘킬러 문제’라고도 했다.

과학계가 술렁였다. 한 물리학 교수는“내지 말았어야 할 문제”라고 단언한 뒤 “만유인력을 알고 눈치 빠른 일부엔 아주 쉬운 문제였겠지만, 만유인력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처음부터 읽어내려간 우직한 수험생들에겐 좌절을 안겨줬을 뿐이다. 과학 지문 해석 능력을 전혀 측정하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많은 과학계 인사들이 비슷한 의견을 냈다.

필자가 주목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역시 과학은 어려워’.  지난주 한국을 찾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니덤연구소의 크리스토퍼 컬른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 학생들의 과학 실력은 뛰어나지만, 과학에 대한 열의는 낮다고 정확히 꼬집었다. 시험 위주의 주입식 교육 때문이라는 진단도 틀림이 없다. 그는 “한국이 정말 성공적인 미래를 꿈꾼다면, 과학 공부의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최준호 과학&미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