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여성 연기자 셋 한무대 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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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 연극계의 정상에 서있는 3명의 여성 연기자가 한 작품에 등장, 그들의 연기력을 겨루는 이색 무대가 펼쳐지게 돼 눈길을 모은다.
백성희 (61·국립극단) 김금지 (48) 박정자 (47·이상 극단 자유)씨가 꾸미는 『여자의 역할』 (4월1∼30일·현대 예술 극장)이 바로 그 화제작이다.
이탈리아 극작가 겸 연출가인 「다리오·포」가 그의 아내인 연극 배우 「프랭크·라메」와 같이 쓴 이 작품은 4부로 구성된 모노드라마. 이를 우리 실정에 맞게 3부로 각색, 한 사람이 한 파트씩을 맡아 차례로 무대에 오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1부 「아침에 일어나서」는 늘 시간과 일에 쫓기며 살아가는 맞벌이 아내가 깨어나면서 출근하기까지의 에피소드를 그린 것.
남편과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자신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남편 뒤치다꺼리, 아기 돌보기, 집안 일로 기진맥진하며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제2부 「여자 혼자서」는 단 한번의 외도로 인해 남편으로부터 집안에 감금당한 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것. 교통 사고 환자면서 엉뚱한 수작을 거는 시동생, 전화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치한, 건너편 아파트에서 몰래 자신을 훔쳐보는 염탐꾼, 폭행을 일삼는 남편, 전화로 알려오는 남편의 외도 등에 시달리다 자신의 핏줄인 아기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찾으려는 몸부림을 담고 있다.
제3부 「메디아」는 남편이 다른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이 철저하게 버림받았음을 느낀 아내는 유일한 자신의 소유물인 자식들을 죽임으로써 남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는 「자유의 여인」을 표출해내고 있다.
연출자 김효경씨가 정한 배역에 따라 「아침에…」는 박정자씨가,「여자…」는 김금지씨가, 「메디아」는 백성희씨가 각각 맡고 있는데 이들 세 사람이 한 무대에 나란히 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은 이색 무대를 착상한 것은 백성희씨.
지난해 대본을 입수한 그는 한 사람의 모노드라마로 진행할 경우 연기자도 힘들 뿐 아니라 자칫 관객들도 지루하게 된다는 점을 의식, 수준급 연기자가 부분별로 극을 이끌어간다면 버라이어티가 생겨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것.
87년 『유리 동물원』 연출 이후 자녀들의 대학 진학 뒷바라지로 무대를 떠나 있던 김금지씨와 『하늘만큼 먼 나라』에서 함께 공연했던 박정자씨의 동의를 얻어 2월초부터 연습해 왔다.
『제 생활 그대로예요. 극 전편에서 아내에 대한 남편의 낮은 이해도가 눈에 뜨입니다. 남편의 문제는 「우리」 문제지만 내 문제는 내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허망한 노릇 이예요.』 (박정자씨)
『대사량이 너무 많아 읽는 데만도 몇분이나 걸리더군요. 30년 연기 생활에서 대사 부담은 한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욀 일이 은근히 걱정스러워요.』 (김금지씨)
『그리스 비극 「메디아」를 현대에 접목시킨 강인한 여성을 표출해 내야 하는데 자식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도덕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매끄럽게 표현해낼 일이 고민입니다.』 (백성희씨)
이들은 모처럼의 한 무대 작업으로 『세련된 연극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고 기염이 대단한데 앞으로 계속 이 작품을 3인의 레퍼터리로 가꾸어 나가겠다고.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 진태옥씨가 처음으로 무대 의상을 맡는가 하면 소극장 사상 최고 관람료 (1만원)에 경인 지역·대전 등지에 지방 예매소까지 두어 화제에 화제를 거듭하고 있다.
공연 시간 1시간30분·평일은 오후 3시30분, 토·일요일은 오후 3시30분·7시30분 2회 공연한다. <홍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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