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권영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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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며칠전 신문 사회면에는 매우 대조적인 두 사건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한쪽 기사는 1억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고교 내신 성적을 조작하고 시험은 일류 대학 재학생을 동원해서 대리 시험을 치르게 한 대학 입시 부정 사건이 있고 다른 한족은 25만원의 박봉에 시달리는 집안 살림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네 자매가 극약을 마셔 1명은 죽고 3평은 중태라는 기사 내용이었다.
입시 부정 사건이 「많이 가진 자」의 부도덕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 사회의 단면이라면, 네 자매의 음독 사건은 「못 가진 자」의 슬픔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애절한 가족 사건이다. 네 자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고 그들 식구 모두가 평생 먹고 학교 다닐 수 있는 거액의 돈을 아들의 대학 부정 입학에 선뜻 내놓을 수 있는 많이 가진 자의 입장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을 것이다.
우린들 언제 유산 받아 공짜로 잘살게 되었는가. 정말 열심히 능력껏 뼈아프게 일하고 돈도 벌었다. 돈 버는데 급급하다 보니 자녀 교육 부실했지, 난들 좋아서 부정 입학시키려 했겠는가. 내 아들이 대학 못 가면 돈이 무슨 소용인가. 대학을 가야 사람 취급받는 사회가 되었으니 모두들 집을 팔아서도 과외 공부를 시키려 들지 않는가. 기부금 입학 제도가 있다면 이런 범죄까지 저질렀겠는가.
문교 정책이 잘못된 거야. 돈 있는 사람 마음놓고 돈 좀 쓰게 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재산가라면 죄인 취급하는 우리 사회 풍토에도 문제가 있다. 들통이 났으니 부정 입학이지 그보다 더 큰 부정이 얼마나 횡행하는가.
도시 근로자 월 평균 임금 56만, 그 이상을 받고 도시에서 중간쯤 산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계층을 「덜 가진 자」로 본다면, 이들 계층이 두 사건을 읽는 독법은 어떠할까.
돈 많은 집안 치고 자녀 교육 똑바로 하는 집 있는가. 사업한답시고 사장님은 하루 몇백만원 날리는 고급 술집 드나들다보면 딴살림 차리게 되고 사모님은 사모님대로 주름살 수술하고 군살 뺀 다음 게이바나 드나들 테니 집안 꼴 불 보듯 훤하지. 아들이 대학 떨어진 다음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어. 진작 손을 써야지. 사랑이 별 것인가. 어렸을 적부터 알뜰살뜰 산수학원 피아노학원 보내 자녀 교육 보살펴 주었어야지. 8학군엘 들어가 유능한 과외 선생에게 틈틈이 배우면 돈 적게 들고 성적 쑥쑥 올라가니 얼마나 좋아.
세상에 귀한 건 뭐니뭐니해도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아들 밖에 없어. 돈 많은 사람들 정신 좀 차려야해.
아니, 아직도 월수 25만원짜리 월급쟁이가 있는가. 뭔가 잘못되었겠지. 무능력자군 쯧쯧. 이런 기사 읽고 나면 엔도르핀 떨어지고 아드레날린만 나오잖아. 신문이란게 밤낮 어두운 기사만 실어. 헝가리에 3억 달러 빌려주고 대국 중국과 소련이 다투어 손벌리며 우리에게 돈 빌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살만한 나라가 된 판국에 이 무슨 촌스런 일이야.
월수 25만원 미만의 근로자 숫자는 87년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1백75만명. 3명의 식구가 달린다면 대충 5백만명. 인구 20%가 농민이라면 8백만명, 그중 40%가 빈농이라면 3백20만명. 못 가진 계층, 근로자와 농민이 8백20만명에 이른다. 여기에 지난 20여년의 독재 정권에 핍박받고 쫓겨난 사람, 어느 해 5월 학교간 아들이 시체로 돌아온 다음부터 눈에 핏발이 선 사람들을 합친다면 줄잡아 1천만명에 이를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많이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더 갖고 싶어하는 자)를 보는 시각은 남미의 민중 운동가「사울·알린스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가진 자-이들은 권력·돈·안전, 그리고 화려하고 좋은 것들을 모두 소유한 자들이다.
사회의 정상을 차지한다. 못 가진 자의 고통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기만의 안주에 만족하며 쾌감마저 느낀다. 이들은 약간의 변화, 약간의 추위도 견디지 못하며 현재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있기를 바란다.
덜 가진 자-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중간에 자리잡으면서 두 세력 사이에 끼어 있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변화를 기대하면서 저들이 갖고 있는 그 나마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인격자가 된다. 변화 속에서 이득을 찾으려 들면서 변화의 위험성을 싫어해 안전을 택한다. 정의와 자유, 그리고 권위에 밝은 것처럼 보이나 『목적에는 찬동하지만 그러나 방법에는 찬성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다. 「알린스키」는 이들을 『미스터 BUT (그러나)』라고 했다.
전국토의 사유지 65%가 5% 미만의 사람들에 의해 소유된다면 이들이 분명 많이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중간쯤 살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덜 가진 자의 숫자가 60%를 넘고 있으니 인구의 65%가 가진 자 쪽에 서게 된다. 만약 이 65%의 가진 자들이 저마다 철옹성을 쌓고 내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고 내 식구만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들 때 그 철옹성은 못 가진 자들의 탄식을 넘어 분노의 대상이 되고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공장을 늘리기보다는 증권에 투자하고 부동산에 묻어두겠다는 기업가의 숫자가 늘어나고 못 가진 자들의 한 맺힌 절규가 차곡차곡 쌓여지는 줄도 모른 채 자신의 성, 자신의 가족에 안주하려들 때 사회는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못 가진 사람들의 분노가 집단화되기 전에, 여의도 농민 시위에 죽창이 나왔다 안 나왔다로 호들갑을 떨기 전에 못 가진 자들을 가진 자 쪽으로 유도하고 편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회가 건전한 사회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일을 주도적으로 펴나갈 수 있는 정부가 능력 있는 민주 정부인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수레바퀴를 삐그덕 소리나지 않게 끌어가기 위해 가진 자들은 양귀자의 산문처럼 『따뜻한 내 집 창 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는 자책의 도덕성을 끊임없이 반추해야만 한다.
못 가진 자의 설움과 독재 정권의 핍박을 받은 사람들의 원한이 한데 어울려 퍼지는 함성을 체제의 도전이라고만 보지 말자. 체제 내부로의 수렴을 거부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장막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위기의 핵심이 계층간의 불화, 계층간의 단절 의식에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게 될 때 위기의 해결은 의외로 쉬워질 수 있다. <논설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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