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말보로 담배 없으면 소 택시 못 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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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스크바에서 택시 타는 법을 아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번의 승차 거부를 당하고는 바로 택시 타는 법을 깨달았으니까.
그때 깨달은 것은 택시 타는 법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크게 깨달은 것은 바로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실태였다.
소련을 들어가는 외국인들로서 피할 수 없이 접촉해야만 하는 기관이 하나 있다.
인투어리스트 (INTOURIST)다.
소련에 하나뿐인 국영 여행사인데, 어느 호텔이고 이 기관의 사무소가 다 있고, 외국인들은 이 기관을 통해 호텔·비행기·열차 예약은 물론 택시 예약을 한다.

<국영 여행사에서만 예약>
소련에 들어갈 때는 미리 이 기관을 통해 여행 일정에 따라 호텔·비행기·열차 편을 다 예약하고 루블 아닌 「강세 통화」로 1백% 선불을 한 다음 그 증명서를 꼭 간직하고 들어가야지, 아니면 큰 낭패를 본다.
현지에 들어가서 그때그때 예약을 하기란 호텔이든 비행기든 열차든 매우 힘들고, 더욱이 예약 된 일정을 변경하기도 매우 힘들다.
또 예약을 취소할 때는 선불한 돈을 돌려 받을 생각은 거의 안 하는 것이 좋다.
환불 요율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 일정을 미리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을 때는, 예컨대 비행기편은 모두 「오픈」 시켜놓고 들어가는게 매우 중요하다.
이번 소련행의 예약을 대행 해준 영국 런던의 여행사는 『비행 일정이 확실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픈 시켜 놓고 들어가라』고 고맙게도 두번씩이나 서울로 텔렉스를 보내왔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의 호텔에 짐을 푼 다음, 택시를 급히 집어타고 어디를 가려면 또다시 인투어리스트와 마주쳐야한다.

<해약 땐 환불액 극히 적어>
소련에 처음 들어가는 외국인이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과 첫번째 만나는 대목이 아마 이 부분일게다.
외국인은 우선 인투어리스트 직원에게 호텔 등록 카드를 제시하고 택시를 타고 갈 행선지와 출발 시간을 이야기 한다.
그러면 예약이 되고, 인투어리스트의 직원은 16절지 갱지를 4분의 1쯤으로 자른 종이에 뭔가를 몇자 적어주고는 택시 요금을 받는다.
이 대목이 바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이다.
택시 요금은 인투어리스트라는 기관을 통해 소련 정부에 내는 것이고, 택시 기사들은 인투어리스트의 예약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주행 거리나 횟수 등에 관계없이 정부로부터 일정한 월급을 받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어느 호텔에 가도 현관 입구는 인투어리스트의 지시를 기다리는 택시 기사들(이들은 내국인이므로 호텔 로비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로 붐빈다.
인투어리스트에서 받은 종이 쪽지를 들고 나가면 이둘 중의 누군가가 쪽지의 내용을 알아보고는 택시를 대게 된다는 것이 택시 타는 「제도」의 골자다.
그런데 외국인으로서 종종 마주치게 되는 문제는, 내일 아침에 타고 갈 택시를 오늘 예약하면 몰라도, 지금 당장 어디를 급히 가야할 일이 생겨 인투어리스트를 통해 택시를 잡으려면 적어도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소련이 외국인 사업가들을 위해 미국의 기술로 지어 올린 모스크바의 최고급 호텔인 메주드나로드나야 호텔에는, 모스크바 시내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상품·서비스 등이 정책적으로 총집중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자가 택시로 2∼3분 거리인 박람회장을 급히 가기 위해 메주드나로드나야 호텔의 인투어리스트에 갔을때 들은 대답은 『차를 구하려면 40분이 걸리고 걸어가면 15∼20분이 걸리니 걸어가는게 낫다』는 친절한 안내였다.

<행선지 먼저 댄 후 흥정>
결국 얼음판 위에서 두어 번 넘어지며 박람회장까지 뛰어가고 말았지만, 바로 이런 때를 위해 모스크바에는 아주 편리한 택시 변태 영업이 성행하고 있다.
이럴 때는 무조건 택시 기사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호텔 현관으로 가서 아무나 붙잡고 행선지부터 대며 흥정을 붙여야 한다.
행선지를 대면 택시 기사들은 저마다 행선지까지 갔다오는 시간들을 재본다.
인투어리스트에서 지정한 다음 지정 시간까지 돌아오기에 충분한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요량이 서면 바로 요금 흥정에 들어가는데, 이때 서울식으로 두배·세배를 제시해봐야 헛일이다.
루블로는 안 되는 것이다.
통하는 것은 오로지 달러 아니면 말보로 담배다.
모스크바 취재 중 최초의 택시 흥정에서 기자는 어김없이 승차 거부를 당했다.
인투어리스트의 예약을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었고 마침 달러도 가진 것은 고액권 몇장 뿐이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필이면 말보로 아닌 던힐을 서너갑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말보로가 있느냐』고 묻고 『없다』고 대답하자 대번에 고개를 가로 저은 택시 기사 덕분에 다음부터는 아예 말보로를 10∼20갑씩 갖고 다니며 급하게 어디를 가야할 때마다 아주 요긴하게 쓸 수가 있었다.

<말보로 1갑에 2달러>
호텔의 외국인 전용 매점에서는 말보로 1갑을 2달러씩에 팔고 있었는데, 말보로 1∼2갑이면 모스크바 시내는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 결국 택시 요금은 2∼4달러하는 셈이다.
모스크바의 택시 타는 법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결코 한번 웃고 치우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경제의 2중 구조, 시스템의 2중 구조가 예컨대 환율·산업·유통·부의 배분·의료보장 등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견고하고 은밀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사회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택시 제도는 그런 2중 구조가 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아주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말보로는 모스크바 택시 기사들의 위법적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개인 수입이다.
말보로를 아무리 많이 준다해도 만일 경찰이 호텔 입구에서 서 있으면 택시 기사들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말보로는 표면적인 사회주의 체제 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력적인 「소품」인 것이다. <모스크바=김수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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