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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적폐 청산보다 합의의 정치가 더 혁명적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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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촛불혁명’

어쩌면 이것은 금기의 질문인지 모른다. 촛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최근에는 ‘촛불혁명’ 혹은 ‘촛불시민혁명’이라는 이름이 굳어지는 듯하다. 논문이나 성명서, 언론 기사 등에서 그 용어가 사용되고, 문재인 대통령도 사용한다. 그러나 역사상 있었던 여러 혁명에 대한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혁명이었는지 고민하게 된다.

정권 따라 바뀌는 최선의 정책보다 #오래 지속하는 차선의 정책이 #훨씬 나은 성과 낳을 수 있어 #문 대통령의 ‘포용국가’ 성패는 #야당과 정치적으로 합의해 #지속 가능하게 하느냐에 달려 #촛불이 혁명으로 승화하려면 #다음 정권에서도 지속하는 #합의의 사회모델 만들어야

계급 구조의 변화나 정치체제의 변화, 헌정 질서의 변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촛불은 엄청난 사건이었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요소들을 갖췄지만,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학문적 평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촛불을 혁명이라 부르는 걸까. 촛불을 혁명이라 부르는 순간 촛불의 의미는 ‘승격’되고, 숭고한 무엇 혹은 거역할 수 없는 소명과 같은 것이 돼버린다. 촛불 시민은 촛불의 명령을 내리는 무오류의 정치 주체가 된다. 무오류의 정치 주체는 민주주의에 역행한다. 민주주의를 후퇴의 수렁에서 건져낸 촛불이, 그것을 숭고한 무엇으로 인식하는 순간 민주주의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촛불사태 이후 정치권 불신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정농단 사태 발생 직후인 2016년 12월 2~4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그래픽 참조). JTBC의 첫 태블릿PC 보도가 10월 24일이었으니까 그로부터 5주 지난 시점이다. 서울·경기와 6대 광역시에 대한 조사인데, 촛불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고려하면 이편이 더 적절하다. 지금은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뜨거운 시간의 한가운데서 조사한 드문 자료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다.

‘최순실 사태’ 이전과 이후에 사람들의 지지 정당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볼 수 있다(정당명은 조사 시점 이름).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 지지자 중 최순실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새누리당을 지지한다고 답한 사람은 32.0%밖에 없다. 세 명에 두 명은 마음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다른 정당 지지로 옮겨갔는가. 그렇지 않다. 새누리당을 떠난 사람의 대부분인 53.3%가 ‘지지 정당 없음’으로 옮겨갔다. 야당이었던 민주당 지지자의 18.2%, 국민의당 지지자의 31.5%, 기타 정당 지지자의 23.1%도 ‘지지 정당 없음’으로 옮겨갔다. 원래부터 지지 정당 없던 사람들만이 최순실 사태 이후에도 여전히 ‘지지 정당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82.6%).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국정농단의 충격적 전말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겹’이었다는 뜻이다. 가장 안쪽에는 국정농단을 일으키거나 묵인·방조한 박근혜와 새누리당에 대한 배신감과 응징의 심리가 있었다면,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외연은 대의제 정치 전반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야당 지지층이 ‘지지 정당 없음’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 당시 집권 세력에 대한 배신감이 가장 강렬한 감정이었지만 다른 정당이나 정치인 등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구성 요소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들’이라는 인식이 더 강해졌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과 ‘민주주의’ 사이의 연결 고리는 이렇게 취약하다. 충격적인 국정농단 사건이 벌어지자 시민들의 첫 번째 반응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평소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떠나는 것’이었다.

적폐 청산은 두루뭉술한 부댓자루

JTBC의 태블릿PC 보도로부터 대선에 이르기까지 24주 동안 사람들이 SNS에 남긴 촛불 관련 글들을 빅 데이터 분석해보면 ‘탄핵’과 ‘분노’가 지배적 담론이었다. 시민들은 쌓였던 울분을 촛불광장으로 들고 나왔다. 광장은 열렸지만, 의제는 조직화하지 않았고 정치 불신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과 정치인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도 질서 있는 퇴진을 언급했다 반발에 부딪혔다.

기성 정치권이 비판 대상이었던 것은 2008년 촛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때와 달랐던 것은 촛불과 대선의 선후 관계이다. 2008년에는 대선 직후 촛불이었고 이번에는 촛불 직후 대선이었다. 2008년의 촛불이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를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끝나버렸다면, 이번에는 촛불의 에너지를 대선으로 이어가야 하는 현실적 과제가 있었다.

빅 데이터 분석 결과는 대선을 불과 몇 주 앞두고 촛불의 에너지가 급격하게 문재인 후보로 모이는 것을 보여준다. 적폐 청산은 여기에서 등장했다. 대선은 다가오는데 광장에 넘쳐나는 조직화하지 않은 울분의 에너지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시민들의 삶 구석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불합리하고 비민주적인 문제들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지 의논할 여유도, 학습할 틈도 없었다.

‘적폐’는 조직화하지 않은 수많은 울분을 아우를 수 있는 단어였고, 따라서 적폐 청산은 광장에 쏟아져 나온 여러 의제의 논리적 귀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폐 청산은 모든 문제를 쓸어담는 두루뭉술한 부댓자루였던 것이다. ‘적폐’는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이라는 뜻이다. 일상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았던 단어이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들고나온 단어이다. 박근혜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이라니, 대통령으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단어 선택이었다. 촛불은 뜻하지 않게 적폐라는 단어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오래 지속하는 차선의 정책 모색해야

촛불 이후에 무엇을 할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민들은 무엇을 근거로 대선 후보를 선택했을까. 대선 직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촛불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정책·정당·강령·이념·국정운영 능력 등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정치 불신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가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후보의 도덕성’이다. 그의 정적들까지 포함해서 보더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정치를 믿지 않기로 결심한 시민들은 도덕적이고 좋은 사람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했다. 그렇게 우리는 ‘문재인 보유국’이 되었지만 동시에 팬덤 정치의 리스크를 키웠다.

문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3년 반 후면 물러나야 한다. 포스트 문재인 시대는 어떤 좋은 사람으로 메울 수 있을까. 사람이 아니라 제도에 열광해야 한다. 남은 3년 반 동안 오래 지속하고 누구나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한국형 국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재인 정부가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남기더라도 다음 대통령이 그것을 뒤집을 것이 뻔하다.

그 핵심에는 합의 정치의 수준을 높이는 과제가 있다. 닫혔던 광장이 열리고 직접민주주의의 요구가 높아지는 것은 좋다. 그러나 동시에 촛불과 더불어 정치를 떠났던 시민들에게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정치는 꼭 필요한 것이며 새로운 합의 정치의 틀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 설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대통령밖에 없다. 합의 정치를 하려면 야당의 요구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고, 적폐 청산은 성에 차지 않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성과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한 장기 시뮬레이션 결과는 하나의 진실을 말해준다. 다음 정권에서 바뀌는 최선의 정책보다는 오래 지속하는 차선의 정책이 훨씬 나은 성과를 낳고, 그런 의미에서 더 근본적으로 혁명적이다.

포용국가는 정치적 합의가 핵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함께 잘 사는 포용국가가 내년도 국정 방향”이라고 말했다. 포용국가에서 어느 4인 가족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상세히 설명했다. 포용국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한 가지 열쇠는 작년에 출간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구상 포용국가』라는 책이다. 대선 기간 문재인 캠프의 싱크탱크였던 국민성장 산하 포용국가위원회에 속했던 12명의 전문가가 함께 펴낸 책이다.

이들은 당시 문재인 후보에게 포용국가의 아이디어를 전수했을 것이고, 실제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장관과 청와대 보좌관, 공공기관장 등으로 요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 다수이다. 성경륭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이 저자들을 대표해서 쓴 서문은 사회 통합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세 가지 원리를 밝힌다. 포용성·혁신성·유연성이다. 맞는 말이다. 각각의 장들은 준비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탄탄해서 저자들이 치열한 고민을 했음을 시사하고 대부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4인 가족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보여준 대통령의 연설과 포용국가의 밑그림을 보여준 이 책은 모두가 맞는 말이지만, 공통으로 하나의 요소를 빼놓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합의하고 따라서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이냐이다.

합의의 사회모델 만들어야

문재인 대통령 취임 첫날 대통령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었다. 진정성은 알겠으나 인구와 기술의 변화 속도를 생각하면 족쇄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일자리의 47%를 앗아갈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와 있는 판국이다. 다가오는 미증유의 세상에 어떻게 대처할지 온 세계가 고민하는 와중에 모범이 될 만한 것은 독일의 인더스트리 4.0이라고들 한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기술과 고용의 관점에서 파악하지만, 독일은 근본적으로 사회 혁신 프로그램이라고 인식한다. 인더스트리 4.0은 독일 특유의 사회 모델, 즉 조정시장경제와 ‘참을성 있는 자본(patient capital)’과 협력적 노사 관계와 기업 간 협업 구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용이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고용을 업그레이드할 기회라고 본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장기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

촛불은 과연 무엇이었나. 촛불을 서둘러 혁명이라 부르기보다, 더는 문재인 보유국이 아닌 시점에서도 지속할 수 있는 합의의 사회모델을 만들었을 때 촛불은 비로소 혁명이 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