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으로 탱크 막아선 천안문 시위 주인공, 대만 망명 … 숨어 살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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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천안문
1989년 6월 5일 오전.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계엄군의 탱크를 가로막고 선 왕웨이린. 유혈 진압으로 끝난 6·4사태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왕씨의 생사가 17년 만에 뒤늦게 확인됐다. [중앙포토]

2006년 6월 천안문
중국의 무장경찰(武警) 소속 경찰관이 4일 베이징의 천안문광장에서 무전기를 들고 경비를 서고 있다. '6·4 천안문 사태' 17주년을 맞은 이날 광장은 평온한 분위기 속에 관광객들만 넘쳐났다. [베이징 로이터=뉴시스]

중국판 광주 민주화운동에 해당하는 '6.4 천안문(天安門) 사태'를 상징하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89년 6월 5일 아침. 호리호리한 청년이 천안문 광장에 진입한 4대의 탱크를 맨몸으로 막고 선 장면이다.

그 청년의 이름은 왕웨이린(王維林). 천안문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이 사진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 민주화 항쟁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주인공인 왕의 생사와 행적은 묘연했다. 몇 년 전엔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돼 처형됐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6.4 천안문 사태 17주년을 맞은 4일 명보(明報) 등 홍콩 언론들은 왕이 대만으로 망명해 타이베이(臺北)시 고궁(故宮) 박물관에서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왕은 탱크의 진입을 막은 뒤 군 당국이 체포령을 내리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베이징을 떠나 모처에서 3년7개월간 몸을 숨겼다. 이후 당국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망명했고 최근까지도 신분을 숨겨왔다. 왕의 친구인 홍콩의 한 교수에 따르면 천안문 사태 당시 왕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의 마왕두이(馬王堆) 고분에서 발굴단장으로 일했다. 여기에서 중국의 민주화를 주장했던 그는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자 친구들과 자진 상경해 시위에 가담했다.

망명한 뒤 대만에서 결혼한 왕은 천안문 시위의 의미를 중국 인민들에게 전하고 싶어 최근 자신의 존재를 언론에 공개했다고 명보가 전했다. 홍콩 언론들은 왕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 시위 주도 학생들의 현주소=21명으로 구성됐던 시위 지도부는 대부분 미국.유럽.대만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베이징대생으로 시위를 이끈 왕단(王丹)은 군부의 진압 과정에서 체포돼 10년간 옥살이를 한 뒤 98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천안문 사태와 관련, 4일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역사적으로 재평가받을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대표 차이링(柴玲.여)은 남편과 독일로 몸을 피했고 지금은 미국 보스턴에서 인터넷 벤처 기업가로 변신했다. 리펑(李鵬) 당시 총리와 직접 대화했던 학생대표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프랑스로 잠입해 대만 유학생과 결혼한 뒤 대만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소속으로 시위를 이끌었던 왕쥔타오(王軍濤)는 13년간 복역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에서 최근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 천안문 사태=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격화된 민주화 시위를 군부가 강제 진압한 사건. 시위가 격화되자 온건파였던 자오쯔양(趙紫陽) 당시 총서기가 실각하고 리펑 당시 총리를 비롯한 강경파가 실권을 쥐고 시위대를 반혁명 폭도로 규정했다. 6월 4일 밤 탱크를 앞세운 군대가 광장에서 발포해 학생과 시민 등 수천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자오 전 총서기 타계를 계기로 중국에서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천안문 사태에 대한 재평가 목소리가 제기됐으나 중국 정부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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