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업 옥죄는 권력의 갑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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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호 34면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고 기업인의 기를 살려주는 것만이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필요조건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법과 원칙이 지켜질 수 있다는 신뢰, 법치의 테두리 안에서 제대로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공권력을 겁낼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법과 원칙이 흔들리면 기업은 어디서 날라올지 모르는 돌팔매를 걱정해야 하고, 기업이 권력의 눈치나 보는 분위기에선 경제의 활력도 미래도 기대할 수 없다.

‘재판’ 들먹이며 대기업에 상생기금 압박 #광주형 일자리는 ‘사회공헌’ 강요로 변질

요즘 기업을 옥죄는 권력의 갑질이 노골적이다. 그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는 ‘자유무역협정(FTA) 이행에 따른 농어촌 민간기업 상생발전 간담회’에 삼성·현대차·SK·LG 등 15개 대기업을 불렀다. 2016년 제정된 ‘FTA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 지원 특별법’에 따라 지난해부터 10년간 매년 1000억원씩 1조원을 걷기로 한 농어촌상생기금에 출연하라고 기업을 압박하는 자리였다. 상생기금 모금 실적은 당초 목표에 턱없이 모자란다. 계획대로라면 지난달 기준으로 1500억원가량이 모였어야 하나 현재까지 걷힌 돈은 475억원뿐이다.

이날 간담회에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이개호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도 참석했다. 국회와 정부가 함께 기업 팔 비틀기에 나선 모양새다. 한 야당 의원은 “이 기금을 내고 정권이 바뀌어도 재판정에는 절대 세우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당시 K스포츠재단 등에 출연했다가 대기업 총수들은 곤욕을 치렀다. 그런 걱정하지 말고 출연해 달라는 정치인의 발언은 할 말을 잃게 한다. 정치권력이 마음먹기에 따라 기업인을 재판에 세울 수도 있고 면하게 할 수도 있는 나라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FTA의 이득은 주로 수출 대기업이 가져가고 농어업인은 무역 자유화로 피해를 본다. 하여 FTA로 인한 사회 전체 이득의 일부를 농어업인의 피해 보전에 쓰는 데에는 공감대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돈 내라고 기업을 협박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생기금 조성은 법에 따른 것이라지만 법률 어디에도 누가, 얼마나 부담해야 하는지 나와 있지 않다. 필요하면 법에 따라 정부 예산으로 농어업인을 지원하는 게 맞지, 강압적으로 기업 돈을 얻어낸다면 훗날 말썽만 불러올 것이다.

노사 상생 모델로 부각됐던 광주형 일자리도 대기업에 부담을 떠넘기는 ‘권력형 강매 비즈니스’로 변질되고 있다. 광주시가 지역 노동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현대차에 추가 양보를 요구하고 있어서다. 노동시간과 평균임금을 노동계에 더 유리하게 바꾸는 바람에 광주형 일자리의 대전제인 적정임금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안정된 노사관계를 보장하기 위한 5년간의 단체협약 유예 약속도 깨졌다.

경제원칙보다 정치가 앞서는 이런 분위기라면 현대차가 굳이 경영에 참여할 이유가 무엇인가. 광주시와 여당은 지금 현대차에 ‘사업’이 아니라 ‘사회공헌’을 요구하고 있다. 이 또한 권력의 갑질이고 기업 팔 비틀기다.

갑질에 분노하는 국민도 기업에 대한 권력의 갑질에는 둔감하다. ‘대기업=강자’라는 프레임이 강력해서다. 하지만 기업 체력도 예전만 못하다. 코스피 상장사의 3분기 영업이익이 반도체 두 회사를 빼면 11.4%나 급감했다. 실적 악화로 아우성을 치는 기업이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법치국가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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