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남용해도 무력해도 안되죠…"|전관응 직지사 조실 신춘인터뷰<이은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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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악산 중턱에 잠시 머물면서 직지인심과 함께 북상을 준비중인 「봄소식」을 들어 봤다.
산등성이의 푸른 잣나무는 천추를 지나도 그 푸르른 색깔에 변함이 없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만고를 휘감아 돌았어도 그 흐르는 물소리를 바꾸거나 고치지 않은 채 옛 그대로였다.
춘설에 뒤덮인 추풍령고개를 넘어 불교조계종 황악산 직지사경내중암에 주석한 한국 불교당대의 강백이며 유식학의 1인자인 전관응노장(80·직지사 조실)과 미국포교생활 15년만에 고혈압 신병 요양차 일시 귀국한 노장의 맏 상자 오법안 스님(57·뉴욕 원각사주지)을 찾았다.

<소신 있게 할 말해야>
-큰스님 그 동안 법체 편안하셨습니까.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화롯불 쬐고, 더우면 부채질하며 잘 지냈소』
-요사이 서울 등 대도시는 주말만 되면 각종 시외로 조용한 날이 없는 지경입니다.『나는 신문도 안보고 텔레비전도 안보니까 세상 이야기는 잘 몰라요. 굳이 한마디한다면 정당지도자·교수·언론인과 같은 사회지도층은 학생이나 근로자들을 향해 소신 있게 할말을 해야합니다.』
-최근의 우리 세속은 1노3김의 시절인연이 어우러지고 있습니다만….
『강남의 매실들이 얼마나 익었는지 궁금하군요』
노 대통령과 3김 야당총재들의 「성숙」을 촉구하는 불교 선문가풍의 응답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겨울은 이상난동으로 따뜻하게 잘 지냈습니다만 봄이 되면서 이른바 「춘투」라는 계절풍이 어느 해보다 세차게 불어닥칠 기미가 보이고 이미 근로자·학생들이 강도 높은 요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이 한 생명체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개체의 생명에 집착한 나머지 아집과 미망에 둘러싸여 허덕이지 말고 저 진여법성의 「근본 생명」을 찾아 합일할 때 이해와 생사를 초월할 수 있는 거요.
유·무정물을 포함해 모든 사물들이 독자적인 본질이라 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따라서 근로자와 사용자, 학생과 기성인들은 모든 사물들이 상호의존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진리를 깨달아 일방적인 아집과 주장을 중화시켜야 합니다. 이 같은 사물의 존재방식을 우리불교에서는 「공」이라 하지요
-우리사회는 걸핏하면 모든 문제가 정치화하고 모든 소용돌이는 정치권으로 귀납돼 들끓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라는 용광로가 등장, 열기를 뿜고 있지요.
『나는 정치는 전혀 몰라요. 그러나 평소의 내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 덕수궁에 들어가 보면 조선시대 왕과 시하들이 자리를 함께 해 정사를 펼치던 청사가 있는데 그 이름을 「중화전」이라고 했더군요.
중이란 근본·바탕이란 말이고, 화란 모든 작용을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조절해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사이 말로 한다면 정통성을 반드시 갖춘 정치권력이 그 힘을 남용하지도 않고 무력하지도 않게 적절히 사용하는게 바른 정치란 얘기이겠지요.』
오녹원 직지사 주지스님이 노장의 이야기를 이어 받았다.

<임기건 도박은 위헌>
『노 대통령과 민정당은 무슨 힘을 믿고 신임을 묻는 중간평가를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갑니다. 지금은 옛날의 여당과는 달라 이른바 여권의 하부지방조직이라는게 거의 무너져버렸습니다.
중앙의 탁상에서 생각하는 논리나 주장이 그대로 통하던 시대는 지나가 버렸어요.
헌법이 보장한 임기를 무슨「도박」처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헌입니다. 만약 노 대통령이 불신임을 받아 자리를 물러나면 나라도 위헌제소를 하겠습니다.
3김씨도 앞으로 한번씩 대통령이 되고자한다면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를 말려야 합니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사회를 위하는 일이라면 눈치보지 말고 소신대로 바른 말을 하고 때로는 정적관계의 대통령일지라도 흔쾌히 도와야지요』
-우리사회는 지금 많은 갈등과 대립 속에 휘말린채 자주·민족·공정분배·사회정의 등을 내세워 목청 높은 외침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비가 오면 날씨가 나쁘다 하고, 비가 그치면 날씨가 좋다고 하지요.
또 해가 계속 쬐면 가뭄이라 하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라고 소란을 피웁니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주의 본체에서 본다면 소나기·홍수·가뭄도 모두 자연의 현상일 뿐 거기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이 같은 우주의 진리를 깨우친 사람에게는 「날마다가 좋은날」이 돼요』

<평상심떠나니 소란>
심오한 선문답에 어려움을 겪는 기자를 연민해 법안스님이 나서주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이른바 의식화됐다는 반체제 인사들도 많이 만났지요. 우선 민족과 통일을 자기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내세우는 운동권 사람들은 솔직해야 합니다.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겠다면 솔직히 털어놓고 나서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게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요.
정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층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발을 내디뎠다가 세불리하면 쑥 들어가 중산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이라며 헤매는데 참으로 한심합니다.』
-신입생을 맞는 대학가에는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오리엔테이션까지 나와 야단입니다.
『알음알이로 미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깨우쳐주어야 하는데….
직지사에 이런 설화가 하나있습니다.
옛날에 정심과 지엄이라는 선사사제가 살았는데 스승은 제자가 입문한지 3년이 돼도 선지를 일러주기는커녕 날마다 밥짓고 땔나무를 해 나르는 일만 시켰지요. 어느 날 지엄은 크게 실망한 나머지 행장을 꾸려 절 문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보따리를 들고 떠나는 제자를 본 정심선사가 떠나가는 이유를 묻자 지엄은 「도를 가르쳐 주지 않아 야속했습니다」고 하직인사를 고했습니다.
정심선사는 발길을 재촉해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지엄을 향해 「지엄아, 지엄아 나를 보아라」고 불렀지요.
「내가 날마다 밥을 지으라고 할 때 너한테 설법을 했고 차를 달여오고 땔나무를 나르라고 했을 때 법문을 해주었건만 네가 몰랐으니 이 법을 받아라.」
지엄은 스승의 이 말 한마디에 문득 깨치고 발길을 되돌려 평상심시도(상식을 떠나지 않은 인간 본심이 바로 진리라는 선문 화두의 하나)의 경절문을 통과, 큰 중이 됐다는 얘깁니다.
전두환씨 문제니, 5공 비리니 해서 국회청문회라는 걸 열고 떠들썩한 요즈음의 세태도 따지고 보면 평상심을 떠났기 때문에 자꾸 진흙탕 속으로 빠져드는 거요』
-그렇다면 전두환씨 문제해결에 무슨 비방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전씨 문제의 해결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상심을 떠나지 말라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모두들 전매특허처럼 강조하는 「도덕성」이란 게 별것 아닌 겁니다. 곽철대오의 깨침이 있은 후 일상생활 속의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상심이 바로 지고한 도이며 도덕성인 것입니다.

<소아 버리고 대아로>
전씨 문제는 우리 모두가 간접적인 책임을 져야할 수치스런 역사지만 한편으론 후대에 거 울이 될 훌륭한 「역사교과서」「윤리교과서」를 편찬해준 역사적 교훈이었습니다』
-끊일 날 없는 불교 조계종 단의 종권 다툼과 일부 승려들의 도착적인 도행에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게 오늘의 한국불교 현실인데….
『승려도 밥 먹고 옷 입어야 삽니다. 승려를 구름 위에서 이슬 먹고사는 사람처럼 너무 우상시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한국불교의 오늘에는 치유하기 힘든 병균들이 너무도 많이 득실거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의 불교현실을 보다 더 많이 비판하고 경책 해주셔도 좋습니다』
-불교는 깨침의 실천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청정한 스님들이 세속에 많이 내러오셔서 중생을 제도하는 사회구원사업에 종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젊었을 때는 뜻을 펴보겠다고 서울 조계사에 올라가 강주도 해보고 했지만 지행합일의 실천이란 성인들의 몫인 것 같아요.
분명히 각성해야할 점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시절인연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기도 하고 뜻 있는 스님들이 원력을 세워 승려교육·불교대중화를 적극 추진하면 될 것도 같고…』
-올 봄을 큰일 없이 잘 넘기고 정치·경제·사회도 자꾸 성숙해야 할텐데 정법안장의 명안종사들께서 보시는 전망은 어떠신지요.
『하나가 3천이고 3천이하나(일즉다다즉일)인게 세상사 아니오.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모든 법들이 하나로 합쳐질 날(만법귀일)이 반드시 올 겁니다.
남북통일도, 지역감정 해소도 결국은 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돌아가는 우주 근본 생명체로의 귀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개체의 생명은 공동체의 생명이 죽으면 절대 보장이 안됩니다. 공동체의 생명이란 바로 우주부체의 생명이고 우리생명의 근원인 자성입니다.」
성속의 시궁창을 휘젓고 난「마른 똥막대기」(건시궐·간시걸 : 아무쓸모 없는 마른 똥막대기와 같은 잠정적 자아에 매달려 있는 중생을 무위진인으로 깨우쳐준 선구의 하나)를 듣고 금바람에 알몸을 드러낸채 (체노금풍) 주부고속도로를 달려 서울에 당도 한 것은 지난 일요일 밤 자정이 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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