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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짓누른 「가난의 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0일 식빵 1 달걀 3」 「12일 두부 2모 콩나물 5백원」「22일 국수 7백원」 「25일 사이다 2백50원」.
지난달 27일 네자매가 음독 자살한 서울 공항동 4의 43 반지하 전세방의 벽에 양태범씨 (43·공원) 맏딸 순미양 (13·G중학 입학 예정)이 써놓은 가게 외상 메모.
아버지는 공장으로, 어머니는 파출부로 나가 텅 빈집에서 어린 동생 넷을 돌봐야 했던 순미양으로서는 가난이 자신을 짓누르는 커다란 짐이었는지 모른다. 동생들에게 극약을 먹일 만큼.
『간호원 언니 미안해요. 집이 가난한데다 올해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세째 동생도 학교에 가게 돼 부모님 학비 부담이 너무 커질 것이 염려스러웠어요. 우리 딸 넷만 없어지면 부모님이 남동생 종모 (2)와 함께 고생 안하고 살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28일 오전 한강 성심 병원 응급실에서 의식을 회복한 순미양이 간호원 (24)에게 일말의 죄책감 (?)을 느낀 듯 스스로 고백한 범행 (?) 동기였다.
자신이 없어져야 다른 사람이 편할 것이라는 희생 심리는 동생들에게 연탄집게로 겁을 줘가며 약을 먹도록 강요하는 극단적 범죄 심리를 유발시켰다.
『지난해 여름 가족끼리 과일을 먹다가 순미가 맘껏 과일을 먹어봤으면 하길래 이 정도 먹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순미가 자기가 죽을 테니 대신 많이 먹으라고 말대답을 하길래 크게 혼찌검을 냈었는데 결국….』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어머니 김옥순씨 (35).
순미양 가족의 비극이 신문을 통해 알려진 28일 오후. 병실에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비롯, 유명 인사들의 문병이 줄을 이었고 각계에서 보낸 성금이 답지했다.
이 같은 일시적인 위문과 성금만으로 과연 절대적 가난이 주는 열등감과 위화감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효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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