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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1932년1월12일-제주 해녀들도 "만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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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삼다의 섬 제주, 맨손의 해녀들이 대낮 주재소를 습격 해 일본 헌병들을 내몰았다. 해산물의 매점 매석으로 폭리를 취하는 일제의 수탈에 여성들이 단결된 힘으로 조직적 저항에 나선 것이다. 세계 사상 유례가 드문 제주 해녀들의 항일 생존권 투쟁은 「기미년 3월1일」 그날 「민족혼」의 각성에서 시작된 우리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다. 그러나 그 동안 현지 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화로 망각 속에 묻혀졌었다.
제주도에서 3·1독립 만세 운동이 최초로 점화된 곳은 북제주군 구좌면 조천리.
3월21일 오후 3시, 서울 유학생 김장환 (당시 휘문고)을 비롯, 김시범·김시은·김영배·고재륜 등 마을 유지와 주민 등 5백여명이 마을 뒷산인 머밑 동산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22일에는 부녀자와 학생 3백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검속자 12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했다.
24일까지 계속된 이 시위에 앞장선 부녀자들이 대부분 해녀들이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만세시위는 진압됐다. 그러나 그 혼은 맥맥이 이어져 13년 후인 1932년1월12일 제주 해녀들의 극적인 투쟁으로 폭발했다. 이날 관내 순시 길에 오른 제주도사 (현재의 도지사) 전중정희 등 일본인 관헌을 태운 승용차가 구좌면 세화리 장터 앞길에 도착했던 때였다.
『와』하는 함성이 터졌다. 검은 잠수복 차림을 한 1천여명의 해녀들이 해초 채취용 낫과 전복 채취용 쇠빗장 등을 들고 몰려나와 도사 일행의 승용차를 에워쌌다. 『우리의 것을 빼앗지 말라』 『악독한 일본 놈은 물러가라.
이곳 저곳에서 해녀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예기치 않았던 사태에 기겁을 한 전중 일행은 세화 경찰관 주재소로 줄행랑을 쳤고 해녀들이 주재소 안으로 몰려들자 일경은 위협 사격으로 맞섰다.
이어 무차별 진압이 뒤따랐다. 해녀들은 일경이 휘두른 곤봉에 맞고 총검에 찔려 하나둘 쓰러져갔다.
이 시위에서 일경에 체포된 해녀는 총 60여명. 『생후 6개월짜리 아들을 재워놓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붙들려 보름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지요. 일경은 해녀복까지 벗겨 온몸을 두들겨 패고 심지어 입 속에 오물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김봉옥 할머니 (79)의 회상.
24일 새벽에는 해녀 5백여명이 「검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세화 주재소를 습격, 순사 1명에게 상처를 입혔다.
26일 일경이 인근 우도로 피신한 해녀 30명을 연행하려하자 8백여명의 해녀들이 일경을 포위, 동료를 구출키 위한 육탄전을 벌였다. 이때 일경은 공포를 쏘아 해녀들을 해산시키고 우도를 탈출했다.
그러나 시위 주동자로 드러난 부춘화·김옥련·고순효·부덕량씨 등 4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목포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살이를 해야했다.
1930년대 제주도 해녀인구는 도 전체인구 16만명의 6%인 1만여명, 이들 중 20%는 영·호남 지역으로 진출 소라·전복·미역 등을 따며 생계를 꾸렸다.
일본 무역상들은 이점을 이용, 하수인인 객주 등을 제주도로 보내 육지에서 잠수를 희망하는 해녀들을 모집하고 수탈의 손을 벌렸다.
『왕복 배 삯은 고리채로 처리하고,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양을 줄여 강제 구매하는 등 횡포가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 할머니의 증언.
1931년5월 구좌면 해녀 부춘화·김옥련씨 등 3백여 명은 일본인 도사 앞으로 진정서를 내고 ▲일본 상인들에게 해산물 구매 상권을 주지 말 것 ▲해산물은 정당한 가격으로 공판할 것 ▲해녀 조합비 징수 제도를 폐지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진정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수탈이 점점 심해지자 해녀들의 분노가 1·12시위로 폭발한 것이다.
『낫과 빗장을 들고 세화 장터로 뛰어나왔던 친구들이 이제는 대부분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1·12의거」의 뜻을 기리는 작은 기념비라도 세워지는 것을 보는 일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향토사학가 김봉옥씨 (65·교육)는 『제주 해녀들의 「1·12봉기」는 3.1운동의 맥을 잇는 여성들의 조직적인 항일 운동이자 한민족의 생존권을 되찾기 위한 민중의 생존권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재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신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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