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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만 번지르르"…동학 농민 전쟁 기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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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을 기념하는 유물들이 대부분 사실과 다르거나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겐 다소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갑오 동학 농민 전쟁에 대한 연구가 최초로 시작된 것은 1932년.
당시 김상기 선생이 쓴 『동학과 동학란』이 최초의 본격 연구서다. 이후 갑오 동학 농민전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최근 들어 부쩍 관심들이 늘고 있다. 그것은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의 민중봉기적 성격에 사학자들이 주목을 하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연구 관심은 아직 구체적인 부분의 사실 규명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기념관의 졸속이 빚어진 것이다.
또한 전시 위주의 문화행 정이 이런 졸속적인 기념관 건립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문화 행정에는 학자가 학문적 입장에서 참여하는 구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오히려 상급 기관 또는 권력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정황이 세심함을 필요로 하는 문화 행정에도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하루빨리 극복되어야할 일들이다.
갑오 동학 유적지는 황토현 마루에 세워져 있는 갑오 동학 혁명 기념탑 (1963년 건립)과 산아래 넓게 자리 잡고 있는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제민당·관리 사무소, 87년12월9일 개관), 그리고 이곳에서 2km쯤 떨어져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살던 집 (74년 보수) 등이 있다.
기념관에 전시된 전시물 중 대표적으로 잘못된 것은 1895년3월29일 처형된 전봉준의 사진.
이 사진이 공개되자 혹시 전봉준의 사진이 아닌가해서 다소 논란이 있었다가 곧 외국 선교사 모습으로 판정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문을 연 갑오 동학 기념관에 버젓이 전봉준의 사진으로 전시되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또 전시물 중 크게 잘못된 것은 기념관 입구 칸막이에 크게 걸린 「남천감로」라고 씌어진 글씨 탁본이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 가인리 암벽 1894년」이라는 내용의 설명이 붙은 이 탁본은 샘물을 찬미하는 시적 내용으로 단아하면서도 날아갈 듯한 초서체로 씌어진 예술품이다.
전봉준이 친히 썼다는 이 글씨는 그러나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다.
그 이유는 전봉준은 서당 훈장을 했다지만 그처럼 예술적인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필자는 글씨 공부 많이 한 서예가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전봉준의 고택에 붙어 있는 설명문에 전봉준이 양반 출신이라고 씌어 있는 것도 분명치 않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오히려 전봉준은 평민 출신의 혁명가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에는 「전봉준 선생이 쓰던…」「동학군이 사용하던…」라는 식으로 단정적인 설명들이 붙어 있는데 실제로 이 설명이 맞는 전시물들은 거의 없다.
대표적 사례로 전시물 중 대포가 있는데 「동학군이 사용하던 대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런데 당시 농민군은 사진과 같은 대포는커녕 신식 총 한 자루도 변변히 가지지 못해 1894년11월 논산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몰살당하다시피 대패했었다.
한편 전봉준의 고택에 걸려 있는 초상화 또한 문제 거리로 지적되고 있다.
전봉준의 영정이 처음 그려진 것은 60년대 중반이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날카로운 눈매에 거무튀튀한 얼굴 색이 민중 속의 혁명가로 제격이라는 평을 받았던 이 그림은 널리 알려진 전봉준이 체포돼 호송되는 장면의 사진을 토대로 그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81∼87년 65억여원의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유적지 정비 기간 중 어느 때인가 유순한 모습의 맥없는 그림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너무 사납게 생겨서」라는 것이 바뀌게 된 이유였다고 한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 옆의 제민당 (각종 행사 때 강당으로 쓰인다)에 걸린 큼직한 전신 영정도 마찬가지다.
깨끗한 도포 차림에 양반만이 쓰는 정자관을 쓰고 있는 모습의 이 그림은 얼굴 모습이 화사한 색상에 둥글둥글하게 살진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분노해 일어선 민중 혁명가의 모습이 어느새 부유한 (탐관오리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대감」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87년12월9일 문을 연 황토현 전적지는 지난 한해동안 3만1천여명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중·고생이나 대학생인 관람객들은 이들 전시물과 그림, 설명들을 통해 갑오 동학농민 전쟁의 실상을 「상상 체험」했을 것이다. 그들 머리 속에 농민군과 그 지도자 전봉준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졌을까.
이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정읍군 주민들은 이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을 기려 20여년 전부터 매년 5월11일 (황토현에서 농민군이 관군에게 대승한 날)을 맞아 성대한 기념 축제를 가져왔다.
최근 몇년간 정치적 이유로 이 행사는 관리들만의 행사가 되어 버렸지만 현지 주민들은 허물어져 가는 봉건 체제의 최후 발악과도 같은 악정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섰던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가슴깊이 간직해온 것이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 민중들의 자생적 근대화 의식의 첫 표출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이 전적지의 기념관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 없는 모조품 청자 항아리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뜻 있는 사람들의 바람이다.
한편 이름이 「동학란」 (60년 이전)에서 「동학 혁명」 (4·19이후부터), 「농민 운동」 (유신 이후), 「농민 봉기」 (5공화국 이후)로 변천해오는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은 아직도 그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다.
1백주년이 되는 1994년까지는 이 같은 진통이 멈추고 갑오 동학 농민 전쟁이 바르게 정리 돼야 하겠다.
(사진 양영훈 기자 글 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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