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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구-임정·한독당의 마지막 "보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백범만 죽이지 말고 우리도 다 죽여서 같이 파묻어라!』
49년6월26일 낮 경교장에서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 4발을 맞고 서거하자 조완구는 이렇게 절규했다.
이 절규는 해방 정국의 도덕적 몰락의 조종이었고 동시에 파행으로 줄달음치는 한국 정치사의 비극적 서곡이기도 했다.
우천 조완구는 일제하에선 백범 김구와 함께 형언키 어려운 신산 속에서 상해 임정을 지켰고 해방 후에는 민족 통일·자주 독립을 부르짖으며 한독당 간판을 끝까지 고수한 강골의 지사였다.
만일 조완구가 몸담았던 김구-김규식 그룹이 당시의 대중적 지지를 업고 해방 정국을 장악했더라면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은 물론 오늘날의 분단은 모습을 훨씬 달리했을 거라는게 일반적 가설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고결한 민족주의자들의 몰락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한국 현대사의 통절한 회한으로 남아 있다.
우천은 1881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계동인 한성부 북촌에서 이조 참판을 지낸 조동필과 부인 안동 김씨의 3남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세 때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조카인 홍정식과 짝을 맺고 21세 되던 1902년 한성법학 전수 학교를 졸업 바로 승훈부 내부 주사로서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1905년 을사보호 조약에 격분, 스스로 관복을 벗어버린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식민지와 만주·상해, 분단 시대의 조국에서 6·25전란 중 납북되기까지 파란에 찬 가시밭길로 이어진다.
관직을 사퇴한 조완구는 항일 민족 종교인 대종교에 입교, 국권 회복에 힘을 기울이다 대종교 본사가 북간도로 옮겨감에 따라 그도 1914년 만주로 망명했다. 거기서 그는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에 참여한다.
국내에서 민족 운동의 분수령을 이룬 3·1운동이 일어난 뒤 김구 등 많은 지사들이 상해로 모여들었고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완구도 이동령 이시영 조성환 등과 더불어 활동 무대를 상해로 옮겼다.
이에 앞서 1917년 국내에 남아 있던 조완구의 가족은 가난과 박해를 견디다 못해 어쨌든 가장이 있는 북간도로 가 극적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봉 한달만에 조완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버렸고 얼마 후 외아들 남규 (당시 17세)가 만인 무뢰배에게 비명 횡사하는 참극을 겪게 된다.
이로써 조완구의 집안은 대가 끊겨버렸다.
이후 25년 귀국 때까지 시어머니와 두 딸 (남건·규은)을 데리고 삯바느질 등으로 연명한 부인 홍정식은 45년2월 타계할 때까지 다시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상해 임정의 의정원 의원으로서 선임된 조완구는 비틀거리는 임정을 바로 세우고자 진력하다 28년1월 김구 이동령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 독립당 창당에 핵심 인물로 관계하였다. 한독당은 그후 임정의 여당으로, 해방 정국의 민족 정당으로 그 존재를 뚜렷이 하다 6·25에 휘말리며 조완구의 품속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30년부터 이동령 김구 조소앙 이시영 김철과 더불어 6인 국무위원으로 임정을 이끌던 조완구는 44년 김원봉 김성숙 장건상 등이 합류한 좌우 연합 내각에서 재무 부장으로 취임,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45년12월1일 망명 31년만에 65세의 나이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다.
인공과 독촉·한민당 등이 저마다 입지 구축에 여념이 없는 속에서 제1차 미소 공위의 개최와 결렬 ,이승만의 단선·단정 기도, 극좌·극우의 극한 대립이 엉클어진 가운데 한독당은 좌우 합작을 통한 통일을 최우선 정책으로 두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정 운동이 더욱 노골화하면서 민족 분단의 위기를 절실히 느낀 김구 김규식 조완구 등은 통일을 위한 최후의 시도로 남북 협상을 촉진하였다.
47년3월11일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성환 홍명희 조완구 등 이른바 7거두가 『남북형제간의 유혈극이 머지않아 빚어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 다음해인 48년4월20일 조완구는 김구 김규식과 함께 평양 북행 길에 올랐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남북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남한만의 선거를 치르며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된다.
김구의 뒤를 이어 한독당 의원장에 오른 조완구는 전란 중 피난 권유를 뿌리치며 『인민군이 나를 반동이라고 쏘면 죽을 뿐이고 국방군이 나를 공산당으로 몰아도 죽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53년5월말 평남 대동군에서 조소앙 엄항섭 오하영 등에게 둘러싸여 72세를 일기로 생을 끝마쳤다.
조완구의 유족 중 홀로 남아 대전에서 살고 있는 둘째 딸 규은씨 (77)는 31년 경성 사범을 졸업, 교사로 봉직하던 중 40년 일제의 창씨 개명에 항의, 교사직을 버리고 간척 사업 등을 하다 62년부터 충남도청에서 근무했다.
규은씨는 현재 3·1여성 동지회 대전직할시 및 충남지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대전=이헌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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