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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폭발 않는 바나듐 배터리 키우는데 … 한국은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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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해외 주요 국가들은 폭발 위험성이 적은 배터리 산업에 투자를 집중하고 있지만, 한국에선 사실상 이에 규제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신재생에너지에 핵심적인 배터리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품질 검증됐다며 리튬만 인증 #다른 배터리 사실상 진입 막아 #리튬은 효율 높지만 화재 위험 #미·일 등은 바나듐 육성 팔걷어

11일 산업통상자원부와 배터리업계 등에 따르면 국내 신재생에너지 업계에선 발전기의 에너지 저장 장치(ESS) 배터리로 바나듐 레독스 흐름 배터리(이하 바나듐 배터리) 등의 차세대 배터리를 상용화할 길이 막혀 있다. 바나듐 배터리는 폭발 위험이 없고 수명·충전 주기가 길다는 등의 장점이 있다.

리튬 배터리와 바나듐 배터리의 장단점

리튬 배터리와 바나듐 배터리의 장단점

그 대신 한국에선 ESS 배터리로 리튬 계열 배터리만 쓸 수밖에 없다. 현행 신재생에너지법(공인인증서 발급 및 거래시장 운영에 관한 규칙 등)에 따르면 국내 발전사업자들은 일정 비율 이상을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해야 하는데, ESS 배터리로는 리튬 2차전지를 써야만 신재생에너지 공급 인증을 받을 수 있다. 결국 바나듐 배터리 등의 다른 배터리를 쓰지 말라고 규제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국내에선 에이치투와 스탠다드에너지, 코리드에너지 등의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바나듐 배터리 투자에 나서고 있다. OCI나 현대중공업, 두산중공업 등의 대기업도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이다.

리튬 이온 배터리는 바나듐 배터리보다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리튬 이온 배터리는 에너지 효율이 우수하다는 등의 장점이 있지만, 바나듐 배터리 등보다 화재나 폭발의 위험성이 높다는 게 업계와 학계의 중론이다.

올해 들어 신재생에너지 발전기 등에서 알려진 것만 10여 건의 ESS 화재 사고가 났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리튬 이온 배터리가 지목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7월부터 전국의 ESS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진행하며 정확한 사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반면 중국과 미국, 일본 등에선 정부가 바나듐 배터리 산업 육성에 발 벗고 나섰다. 특히 중국은 2008년 중국과학원과 대련 화학물리연구소 등이 ‘롱커 파워’란 회사를 설립하고 지난해 1억1100만 달러(약 1250억원)의 바나듐 배터리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미국에선 2012년 퍼시픽 노스 웨스트 국립 연구소가 중국의 보롱 그룹과 합작한 회사 UET를 만들었다. 이 기업은 지난해에만 4100만 달러 어치(약 463억원)의 바나듐 배터리를 판매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비주얼캐피털리스트는 “전 세계 주요 10개국의 바나듐 배터리 수요는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80% 증가해 7000㎿ 이상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바나듐 배터리 업체의 대표는 이날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은 바나듐 배터리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며 “정부가 지원해주는 것까지 바라지 않는다. 리튬 이온 배터리 등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끔만 해줬으면 좋겠다. 어떤 배터리가 ESS로 쓰기 좋은지는 시장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가 신재생에너지를 보급하면서 관련 산업을 육성한다고 해놓고선 왜 이런 장애물을 그대로 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신성필 산업부 에너지 신사업과장은 “다양한 차세대 배터리 산업이 발전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선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리튬 2차전지만 인증한 이유에 대해선 “리튬 2차전지만 안정성과 품질 등이 완전히 검증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강병우 포항공대 신소재공학과 교수는 ESS 배터리 기술에 대해 “바나듐 배터리는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안정성이 높지만, 부피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스마트폰이나 전기차 등을 위한 배터리로는 적합하지 않아 그동안 리튬 이온 배터리가 시장을 지배해왔다”고 설명했다.

김민중 기자 kim.minjo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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