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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방방곡곡서 폭발한 "독립만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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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봉기>
거사일인 1919년 3월1일 오후2시가 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들이 약속한 장소인 태화관에 모였다. 원래는 민족대표들이 학생단과 함께 파고다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약속되었었으나 전날의 점검회의에서 장소를 학생단과 분리하여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거행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독립 만세를 3창하여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뒤이어 연락을 받은 일제 경찰이 출동해서 민족대표들을 연행하여 체포했다.
한편 같은 시간에 사전 연락을 받은 서울시내 중학교급 이상의 학생들과 시민들 수봉 기천명이 파고다공원에 집합하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은 민족대표들이 파고다공원으로 오지 않고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자 실망했지만, 이에 낙망하지 않고 학생대표의 하나를 팔각정에 등단시켜 독립 선언서를 낭독케 하였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자손 만방에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학생들 따로 선언식>
학생대표가 감격에 넘치는 음성으로 2천6백자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끝내자 수천명 외 학생과 시민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공원이 떠나갈듯이 외쳤고 일제의 잔혹 무비한 탄압에 오랫동안 억눌렸다가 폭발한 독립만세의 함성은 서울 장안을 흔들고 바야흐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어가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독립 만세』를 연창하면서 공원에서 거리로 뛰쳐나와 고종의 국장을 보러 올라 온 지방민들과 함께 수만명이 대오를 이루어 서울시가를 누비면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1일에는 서울과 거의 동시에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주·원산 등지에서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3월2일에는 함흥·해주·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 등지에서 민중들이 독립만세 시위에 봉기하였다.
3월3일에는 예산·개성·사리원·수안(재차)·송림·곡산·통천 등지에서 독립만세 시외운동이 일어났다. 3월4일에는 옥구·성천·양덕·용천 등지에서 민중들이 봉기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만세 시외운동이 점차 지방농촌으로 파급되면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기별로는 3월20일부터 4월9일 사이에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절정에 달했으며, 4월말까지 전국 각지방에서 시위운동이 순환적으로 전개되었고, 5월에 들어서도 독립만세 운동은 몇 개 지방에서 계속되었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12부2백20개군 중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12부2백11개 군에서 일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만으로도 3·1운동이 전국적 독립 운동임이 증명되지만, 사실은 일제의 통계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대외적으로 극소화해서 보고하라는 지시에 의해 비교적 대규모 시위만 축소해 보고한 것이었고, 50명 이하의 마을 시위들까지 보면 전국적으로 모든 군에서 한군데도 빠짐없이 3·1운동에 봉기하였다.
자발적 시위 전개 또한 주목할 것은 3월1일 서울에서 33인의 민족대표가 일제 경찰에 연행, 체포된 후 전국 각지방에서 봉기한 3·1운동은 지도부 없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조직하고 봉기한 민중 독립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식인들은<학교>와<교회>를 근거지로 하여 선도부대가 되고, 농민들은<마을>과<장터>를 근거지로 하여 주력부대가 되어 시민 층과 노동자층이 적극참여 자발적으로 독립 선언서와 격문과 전단과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주로<장날>을 기하여 자발적으로 봉기해서 대대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한국민족의 3·1운동은 국내에서만 봉기한 것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일어났다.
3월12일에는 만주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와 통화현 금두에서, 3월13일과 17일에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북간도 용정에서, 3월17일에는 두도구, 3월20일에는 혼춘, 3월21일에는 봉천 안산참, 3월25일에는 영화사 송언, 3월26일에는 백초구, 3월27일에는 국자가, 3월30일에는 곤륜산, 4월4일에는 대왕청과 대감자, 4월10일에는 대도구와 용정(3차), 4월17일에는 동대인구, 4월18일에는 냉수천자에서 한국인들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노령 연해주에서는 3월17일 블라디보스토크와 니클리스크, 3월18일에는 스파스고예, 3월21일에는 라즈도리노예, 4월5일에는 녹도에서 한국인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미주지역에서는 3월 15일에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서 대한민국 민회의 독립시위 대회가 열렸으며, 4월 5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의 독립관에서「한인 자유대회」가 개최되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막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결의하였다.
한국민족의 이러한 전 민족적 민중 독립운동으로서의 3·1운동은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국내는 물론 세계 도처에서 전개되어, 박은식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5월말까지 집회수가 1천5백42회, 참가 인원수가 2백2만3천98명에 달하였다. 이것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독립시위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총인구에 대한 비율로 볼 때 당시까지의 전세계 약소 민족 해방운동사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독립시위운동이었다.
한국민족은 3·1운동에서 널리 아는바와 같이 처음부터 비폭력 방법을 택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했으나, 일제는 처음부터 총검으로 이를 탄압하고 평화적 시위군중을 학살하였다. 일제 총독「하세가와」(장곡천)는 조선 주차 군사령관「우쓰노미야」(우도궁) 에게 발포명령을 내렸으며, 일본 육군성도 3월7일 무력으로써 시위를 미연에 방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제군경은 전국 도처에서 한국민족의 평화적 시위군중을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예컨대 유명한 애국소녀 유관순이 선도한 천안 아우내장터의 4월1일 독립만세 시위에서는 일제 군경이 무차별 충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농민 20명을 학살하고 수많은 군중을 부상시켰다. 화성군 제암리에서는 일제 군경이 4월15일 민간인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 안에 모아놓은 뒤 밖에서 문을 잠그게 하여 방화를 한 채 집중사격을 가해 부녀자와 어린애까지 28명을 학살하고 교회건물과 민가 31호를 불태웠다.

<만주·노령·미서도>
일제의 이러한 학살 만행은 처음부터 자행되었다. 예컨대 3월4일 성천의 2천명 시위에 대해서 일제 군경은 무차별사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30명을 학살하고 38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맹산의 3월6일 독립만세 시의에서는 일제 헌병대가 선도자 10여명을 헌병분견소에 구속하자 3욀10일에 약1백명의 농민이 헌병 분견소에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했는데 일제 헌병대는 이들을 마당으 끌어들여 가두어놓고 전원 총살을 명하여 현장에서 54명을 학살하고 13명을 부상시켰다.
여기서는 몇 가지 사례만 들었지만 일제 군경의 평화적 시위군중에 대한 학살은 전국도처에서 자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다수의 시위 선도자들을 체포·투옥, 온갖 잔인 무도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애국자들이 옥중에서 순국하거나 평생 불구자가 되었다. 박은식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3월1일부터5월말까지 일제 군경에 의한 한국인 시위자의 사망자수가 7천5백9명, 부상자수가 1만5천9백61명, 피체포 자수가 4만6천9백48명에 달했다.

<잔인한 학살·만행>
그러나 한국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야수적 학살 탄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웠다.
시위 군중들은 일제가 발포하면 용감히 대응하여 일제 헌법 분견소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고 면사무소에 쳐들어가 이를 접수하기도 하였다. 한국인이 3·1운동에서 얼마나 용감하게 전진했는가에 대해 중국 5·4운동 당시 중국인들은 정주 최석일의 예를 들었다.
정주에서는 3월31일 장날을 기하여 약 4천명의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는데 일제헌법이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던 청년 최석일의 태극기를 든 오른팔을 내리쳐 팔과 태극기가 떨어지자 최석일은 이에 굴하지 않고 태극기를 왼손으로 집어들어 계속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제 헌병은 다시 그의 외팔마저 일본도로 내리쳤다. 최는 양팔을 다 잃고도 입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다. 이날 일제 군경은 정주 장터에서 28명을 학살하였다.
이렇게 봉기하여 전개된 한국민족의 전민족적 3·1운동은 당시 1천7백만 인구 중에서 2백여만명이 봉기한 독립만세 시위 운동으로 발전하여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더욱 막강해진 일본 제국주의를 강타하고 한국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것이었다.<서울대교수·한국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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