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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김의겸의 스펙조작, 문재인의 공정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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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난 이렇게 아들의 ‘스펙 조작’에 가담했다.”

부족한 윤리의식 보여주는 대변인의 일탈 #생활적폐 내세워 또 ‘다른 편’에 칼날 겨누나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 시절이던 2014년 말에 쓴 칼럼 제목이다. 부정(父情)을 내세워 행한 이 대담한 ‘부정(不正)행위 고백 칼럼’은 제목 그대로 당시 고3 아들의 수시 준비 과정에서 부자(父子)가 어떻게 스펙을 조작했는지를 적고 있다.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니다. 아들이 원서 마감 직전 봐달라고 가져온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에 스펙이라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를 여러 번 봤다는 게 고작이라 눈앞이 캄캄해져서는 부랴부랴 사회성 짙은 다큐멘터리를 여럿 골랐단다. 그는 “아이가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찍부터)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로 결심한 ‘열혈 소년’이어야 했기에” 아들이 지난 15년간 이런 류의 다큐멘터리를 봐오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위장해 한줄 한줄 채웠다고 했다.

윤리적 죄책감에 뒤늦게라도 각성하는 글인 줄 알았는데 칼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아이가 스펙이 필요한 수시에서는 떨어지고 수능점수만 보는 정시에선 붙었다는 걸 언급하면서 자신에게 슬쩍 (부정행위로 얻은 이익이 없다는) 도덕적 면죄부를 부여한 후, 반성 대신 비판을 이어간다. “애초에 우리 같은 ‘얼치기 부자 사기단’에 넘어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며 “‘스펙 꾸미기’에 동원할 수 있는 돈과 권력, 정보가 있다면 더 그럴듯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입시제도가) 아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을 세우고 있다”고도 했다.

칼럼에서 지적한 여러 부조리와 모순엔 적잖이 수긍하면서도 그의 일부 주장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가령 그는 “자식을 둔 부모라면 누군들 반칙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사실이다. 그의 말 대로라면 쌍둥이 두 자녀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지금 수사를 받고 있는 숙명여고 교무부장의 범법행위마저 합리화할 수 있지 않겠나. 교무부장 역시 때마침 정답이라는 고급 정보를 손에 쥔, 자식을 돕고 싶은 유혹에 빠진 한 아비일 뿐일 테니 말이다. 누구나 유혹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유혹이 있다고 누구나 반칙을 하지는 않는다. 돈, 권력, 정보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 정보가 있어서 반칙을 하는 게 아니라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반칙을 한다. 그리고 스스로 밝혔듯이 김 대변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시선 11/02

시선 11/02

시험문제 유출 의혹사건 같은 범법행위까지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컨설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입시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편법과 부정에 비하면 결국 붙지도 못할 정도의 조악한 스펙 조작 따위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입시는 누가 더 잘 속이느냐의 경쟁”이라느니, “드러나지 않은 과거의 부정을 감안할 때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의 죄는 ‘들킨 죄’일 뿐”이라느니 하는 냉소적인 비판이 쏟아지는 것만 봐도 실제로 많은 이들이 김 대변인보다 더한 반칙을 일삼았고 또 지금도 일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또 아무리 많은 이들이 한다 하더라도 부정행위는 부정행위일 뿐이다. 실패한 사기라고 다르지 않다. 여기엔 관행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여지가 없다.

김 대변인의 오래된 칼럼을 소환한 건 어제(1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생활적폐’라는 단어를 언급해서다. 문 대통령은 “나라다운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은 우리 정부의 확고한 국정지표”라며 “일상에서의 작은 불공정도, 조그마한 부조리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사회를 원하는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여 권력적폐를 넘어 생활적폐를 청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사회를 만드는 데 국회가 함께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생활적폐가 무엇인지, 또 그가 그리는 공정사회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지금까지의 기조로 볼 때 교육비리든 고용비리든 갑질이든 적폐청산의 대상은 ‘우리 편’이 아닌 ‘남의 편’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가 전 정권에서 빚어진 강원랜드 채용비리엔 당장 직권면직이라는 강수를 들면서도 노조와 결탁한 이 정권의 서울교통공사 등의 고용세습엔 아예 눈을 감은 것만 봐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생활적폐의 칼을 꺼내기 전 문재인 정부가 내내 휘둘렀던 권력형 적폐의 칼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인된 위장전입에다 설명되지 않은 숱한 의혹 탓에 국회가 거부한 유은혜 교육부 장관에게 문 대통령이 끝내 임명장을 줬을 때도 김 대변인은 “국민들의 눈높이에 비춰 결정적 하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땐 그저 이 정부 특유의 내 편 챙기기 내로남불이라고만 생각했다. 칼럼을 다시 읽고 보니 김 대변인에겐 이 정도의 도덕성 결여는 정말 용납 가능한 수준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맨날 적폐청산과 공정사회를 얘기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