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59)
얼마 전에 방송대 출석 수업이 대구에서 있었다. 멀리서 온 한 동료와 숙박을 함께하며 즐겁게 지냈다. 수십 년을 벼르고 별러 실행한 배움이라 그의 얼굴에선 종일 행복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예순 살이 다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행동으로 옮긴 자신을 칭찬을 주고 싶다며 대견해 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는 날 아침에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동기가 아침을 안 먹는단다. 종일 수업을 받으려면 밥심으로 이겨내야 하는데 갑자기 명치끝에서 무언가가 꽉 막혀서 못 먹겠단다. 우울한 동료 앞에서 혼자 밥 먹기도 뭐해서 학교로 걸어가며 떠난 남편 뒷담화를 하며 걸었다.
“언젠가 운전 면허증을 따기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지. 남편과 아이들은 자고 있어서 이른 아침을 차려 상보를 덮어놓고 살금살금 나왔어. 물론 남편에게도 전날 밤 이야기를 해놓았고. 그땐 도로 주행코스가 없을 때라 필기시험을 보고 합격이면 오후에 바로 실기시험을 쳤는데 하늘도 맑고 기분도 좋아서인가 마음을 차분하게 임하여 코스를 돌아 나오니 ‘합격~’이라고 크게 말해 주는데 그 기분은 아는 사람은 알 거야.
그래서 그 기쁨을 남편에게 전하기 위해 시험 시간 내내 꺼놓은 휴대폰(인지 삐삐인지)을 켜니 전화번호가 수십 개 뜨는데 모두 집이었어. 그러고는 음성도 몇 개가 들어 있는 거야. 시험 치는 중에 걸려온 거니까 당연히 못 받은 거지.
내용이 뭔고 하니 여자가 아침부터 밥도 안 차려주고 어디 가서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냐는 내용인데 이건 순화한 거고, 해석이 불가한 신이 내린 언어를 마구마구 해놓았더라고…. 하~ 그날의 기분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어.
왜 남편들은 하루만 지나면 전날 한 말을 잊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무조건 부인은 옆에 있기만을 바라는 걸까? 남편보다 더 잘 될까 봐 겁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멍하니 TV를 보고 있더라. 대화하기도 싫어서 앉아보라고 하고선 음성 메시지를 들려주니 제 목소리에 자기가 놀라서 얼른 꺼버리더라고.
그, 참, 신기한 모습을 보았지. 자기가 한 말인데도 본인은 그런 말을 절대 안 했다는 거야. 하하하. 그러곤 겸연쩍은지 아침에 식탁 위에 쪽지를 안 써놓고 간 내가 잘못이라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치더라고. 이후에 몇 번을 더 녹음하는 방법을 써서 아주 조금 고쳐졌어. 어느 철학책에서 본 건데 뱃속부터 배워온 습관은 고쳐지지 않는대. 본인이 노력한다고 해도 본질은 남아 있는 게 습관이라더라.
내가 그 상황이 있고 난 후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봤어.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소년으로 변하는 것 같아. 온갖 짜증을 다 부리고 소리소리 지르는 건 엄마가 없을 때 하는 행동 같은, 네가 안 보이면 두렵고 허전하다는 뜻이야.
엄마가 반경 몇 미터 내에서 얼쩡거리며 그림자라도 보여줘야 안심이 되는 소년처럼 말이야. 물론 또 다른 뜻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남자들도 있겠지만 내 남편은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어. 정답은 아니지만 살면서 그냥 그렇게 내 맘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니 덜 속상하더라. 그래도 그땐 얼마나 밉고 꼴 보기 싫던지 삐쳐서 내가 오랫동안 말을 안 했어. 그래서 지금은? 전혀 안 그러지. 백기를 들고 먼저 떠났거든. 하하.”
우울하던 동료가 길에서 배꼽을 잡으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지금 내 상황이 그 상황이라오. 어찌 그리 똑같을까? 하하하.”
사실은 아침에 그가 전화를 받을 때 상대방이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지르던지 그 음성을 조금 들어서 선무당이 되어 본 것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해줬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야. 나를 위한 지금의 시간, 태풍이 몰아쳐도 포기하지 마. 가끔 막혀서 숨도 쉴 수 없을 때 그것이 굴뚝이 되어 줄 수도 있으니….”
크게 웃고 나니 뱃속이 허전하다며 길가에 있는 콩나물국밥 집에 들어가 아침을 먹었다. 5분 지각을 외치며 우리는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뛰었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