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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바빠서… 딸에게 칭찬 한마디 못했던 그 시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58)

어느 날 장성한 자식과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배움의 증서를 선물한 자랑스러운 여동생. 자격증이 한 개씩 쌓일 때마다 그 핑계로 형제가 모여 외식을 했다. [사진 송미옥]

어느 날 장성한 자식과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스스로 배움의 증서를 선물한 자랑스러운 여동생. 자격증이 한 개씩 쌓일 때마다 그 핑계로 형제가 모여 외식을 했다. [사진 송미옥]

오래전 부모님이 살아 계실 적 바로 아래 여동생이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 그 당시엔 어려웠던 조리사 자격증도 땄다. “아버지! 나 드디어 전문 조리사가 되었어요” 하며 달려 들어온 동생에게 아버지는 덤덤하게 “그래? 잘했구나…” 하시며 표정도 없이 헛기침하시곤 보시던 TV를 보셨다고 한다.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던 동생은 아버지가 엄청 기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 별로인가 보라며 서운한 마음을 얘기했고, 우리 형제들끼리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런데 며칠 후 친정에 가서 만난 동네 사람이 “아이고~ 그 집 작은딸 조리사 되었다며. 아버지가 당신 딸 늦은 나이에 자격증 하나 땄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밥도 사고 그러데…. 정말 축하 한데이”란다.

슈퍼 주인아줌마도 “아이고~ 동생이 자격증 땄다면서? 아버지가 요구르트를 한 박스나 사 가시길래 물었더니 작은딸 자랑을 하면서 성당 사람들과 나눠 드실 거라며 사가셨어”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온 동네 아는 사람들에게 밥 사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자식에게는 덤덤하게 사랑을 감추고 평생을 사셨다.

딸이 대학을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장학증서를 받아 왔을 때 나는 엄청 기뻤다. 그때 하필 중요한 통화 중이라 다른 한쪽 손으로 증서를 들고 보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딸이 나가고 없었다. 나는 거래처의 급한 통화를 멈추고 딸아이를 안아 등을 토닥거리며 “장하다. 장해~” 하며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 그 당시의 행복을 주인공에겐 표현 못 하고 친구들과 형제들에게 자랑하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늦은 저녁에 딸이 들어오길래 축하한다고 호들갑을 떠니 “남들도 다 받는 상인데 뭐…” 하며 넘어갔다. 나는 그때 딸아이가 삐친 것을 모르고 제 외할아버지 닮아서 말투가 그렇다며 투덜거렸다.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손녀가 미술대회에서 처음으로 상을 탔다. 옛날 생각이 나서 크게 축하해 주었다. [사진 송미옥]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손녀가 미술대회에서 처음으로 상을 탔다. 옛날 생각이 나서 크게 축하해 주었다. [사진 송미옥]

세월이 지나 최근 청소를 하다가 본 딸의 일기장엔 그 날의 풍경이 적혀 있었다. ‘엄마는 냉정하게 내 장학증서를 한손에 들고 힐끗 보더니 탁자에 던져 놓고는 하던 통화를 계속했다.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을 짓밟은 엄마의 행동에 어쩌고저쩌고….’ 내가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하는 그 시간을 상대방은 가장 섭섭한 시간으로 기억하며 살아온 것이다.

우리 시절엔 아버지를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하고 저 높은 곳에 있는 어른으로 여기고 살았어도 마음속 애정으로 서로 엄청 많이 사랑하는 것을 느끼며 살았다. 서로 등을 두드려 주며 크게 칭찬하지 않았어도 부모님이 기뻐할 일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행복했다. 그냥 남들처럼 좀 더 기뻐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이전엔 먹고 살기가 바빴고 표현의 방법이 서툴러서 그렇다고 하지만 요즘은 통신의 발달로 표현도 각양각색으로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정서적인 작은 행동 하나 발견했을 때 ‘정말 대단해. 정말 잘했어. 멋져’라는 말로 그때를 잘 맞춰 호들갑스러운 표현을 해서 기를 세워주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의 좋은 행동이나 상을 탄 것을 보고 주위에서 “대단해요”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 엄마들은 겸손한 마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뭘요~ 그렇지도 않아요”라며 낮춰 말한다고 어느 책에 쓰여 있었다. 그것은 정말 잘못 하는 말이란다. 남들 앞에선 더욱더 아이들에게 무한한 긍정을 표현해 줘야 한단다. “정말 대단하지요?” 하면서.

순간의 칭찬이 진로를 바꾸고 평생을 움직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그때 기를 못 살려줘서 제 하고 싶은 공부를 더 못한 게 아닌가 반성해 본다. 축하할 일은 아끼지 말고 바로바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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