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걸객원의학전문기자의우리집주치의] 고 이종욱 WHO 사무총장, 완벽주의만 아니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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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무엇이 이런 비극을 낳게 한 것일까요. 함부로 단정짓긴 어렵지만 저는 그의 타입A 성격이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기서 A란 영어의 'Aggressive(공격적인)'에서 유래합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성취지향적이며,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사람의 성격입니다. 항상 시간에 쫓기며 일을 하고 빈둥거리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1950년대 미국의 심장전문의 메이어 프리드먼은 이런 성격을 지닌 경우 보통 사람보다 심장마비가 두 배 많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타입A(type A) 성격'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오늘날 타입A 성격은 콜레스테롤.흡연.고혈압과 함께 심장병과 뇌졸중 등 혈관질환의 중요한 위험요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골프장에서 퍼팅 시 돌연사하는 경우도 이들 성격의 소유자에게 흔합니다. 홀에 공을 반드시 집어넣어야 한다는 과도한 압박감이 심장에 부담을 주기 때문입니다.

발병 과정은 아직 명확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 성격의 소유자는 만성적인 아드레날린 과잉분비 상태에 놓여 있게 되고, 이것이 혈관을 손상시킨다고 봅니다.

2002년 말 제네바에서 그와의 만남이 기억납니다. 사무총장이 유력하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터뷰는 잘 끝났습니다. 문제는 사진이었습니다. 사진기자를 대동하지 못해 제가 직접 찍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진에 문외한인 제가 세계보건기구 건물과 그의 얼굴을 함께 담아야 했는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은 비도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몇 컷 대충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직접 사진에 만족할 때까지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사진을 찍도록 했습니다. 사진 촬영에만 한 시간 넘게 걸렸을 정도입니다. 소탈해 보이지만 매사에 꼼꼼한 분이셨던 것이지요. '백신 황제'란 칭호를 얻고 국제기구 수장까지 오른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입A 성격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성격입니다. 그러나 돌연사란 치명적인 칼날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의 명복을 빌면서 때론 여유를 갖고 빈둥거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홍혜걸 객원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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