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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의 에코파일] 하얗다고 다 알비노 동물? … 류시즘도 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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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알비노 원숭이. 몸 전체가 흰색 털로 덮여있고 눈동자도 특이하게 빨간색이다. [중앙포토]

알비노 원숭이. 몸 전체가 흰색 털로 덮여있고 눈동자도 특이하게 빨간색이다. [중앙포토]

희귀한 흰 참새나 흰 고라니, 흰 사슴 등이 발견되면 화제가 된다. 지난달 25일 설악산국립공원에서 흰 다람쥐가 발견됐고, 언론에서는 멜라닌 색소가 없는 알비노(Albino) 동물이 모처럼 발견됐다고 앞다퉈 보도했다.

흰 동물은 ‘길조’ … 관심 끌어 #알비노는 멜라닌 없는 돌연변이 #류시즘은 색소세포 안생기는 것 #에이즈 낫는다는 미신 때문에 #흑인 알비노 살해 위협 받기도

하지만 조류생태학자인 최순규 박사는 “다람쥐가 흰색인 것은 알비노라서가 아니라 류시즘(leucism)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동물이 흰색을 띠고 있다고 해서 다 알비노가 아니라는 말이다. 최 박사는 “동물의 경우 눈 색깔을 보면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눈 색깔이 붉거나 분홍색이면 알비노, 다른 개체들처럼 정상적인 눈 색깔을 보이면 류시즘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알비노와 류시즘의 이런 차이는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 것일까.

먼저 알비노, 즉 알비니즘(albinism, 백색증)의 경우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에 나타난다. 멜라닌을 생성에는 여러 효소가 간여하는데, 이들 효소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 효소가 원래 기능을 못 하게 되면 멜라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티로시나아제(tyrosinase) 효소다. 아미노산의 일종인 타이로신을 멜라닌으로 바꾸는 데 간여하는 이 효소에 문제가 생기면 알비노가 된다. 다른 색소는 잘 만들어지는데 멜라닌 색소만 없는 게 알비노다.

알비노를 일으키는 유전자는 열성이다. 짝을 이룬 두 염색체 중 하나에만 정상적인 유전자가 있으면 알비노 유전자 특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알비노가 되려면 부모 양쪽에서 돌연변이 유전자를 물려받아야 한다. 알비노가 근친 교배한 동물에서 많은 이유다. 알비노의 경우 눈동자가 붉은색이나 분홍색을 띠는데, 이는 홍채나 망막 색소 상피(RPE)에 멜라닌이 없어서 그 아래 눈동자 혈관 색깔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류시즘을보이는키위 새. 짙은 갈색 깃털 대신에 흰색 깃털로 덮여있는데, 눈동자는 정상적인 검은색이다. [중앙포토]

류시즘을보이는키위 새. 짙은 갈색 깃털 대신에 흰색 깃털로 덮여있는데, 눈동자는 정상적인 검은색이다. [중앙포토]

반면 류시즘은 유전자 탓이 아니다. 유전자는 정상인데 수정란이 세포 분열하고 조직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나타난다. 척추동물 수정란의 발달 과정에서 신경릉(神經陵, neural crest)으로부터 색소 세포가 피부·모발·깃털 등으로 이동하거나 분화할 때 문제가 생긴 경우다. 그래서 몸 표면의 전체 혹은 일부에 색소 세포가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색소 세포 자체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생긴 경우이기 때문에 류시즘에서는 멜라닌뿐만 아니라 다른 색소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류시즘의 경우 눈동자 색깔은 대부분 정상이다. 눈동자 색소와 피부 색소의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피부나 깃털 등의 색소 세포가 신경릉에서 분화되는 것과는 달리 망막의 멜라닌 생성 세포는 신경관(神經管, neural tube)의 외부 주머니에서 시작된다. 신경관에서 눈술잔(optic cup)과 망막이 만들어진다. 류시즘 현상 탓에 몸 다른 곳에는 색소가 없더라도, 눈동자에서는 색소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흰 동물을 보고 길조(吉兆)라고 하지만, 자연 생태계에서는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하얀 색깔을 가진 동물은 눈에 잘 띈다. 포식자로부터 몸을 숨기는 데 불리하다. 또, 먹이 사냥을 하는 경우에도 먹잇감이 접근을 쉽게 알아채고 달아날 수 있다. 눈에 띄는 색깔을 하면 동료들로부터 추방당할 수도 있고, 짝짓기하는 데도 불리할 수 있다. 알비노의 경우 다른 유전적인 결함도 동시에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생존율이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알비노 쥐나 고양이의 경우 청각에도 문제가 있다. 흰색은 태양 자외선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 불리하다. 멜라닌이 든 멜라닌소체(melanosme)는 강한 자외선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알비노 어린이. 마법이 생긴다고 믿는 이들의 공격으로 팔다리를 잃었다. [AP=연합뉴스]

아프리카의 알비노 어린이. 마법이 생긴다고 믿는 이들의 공격으로 팔다리를 잃었다. [AP=연합뉴스]

알비노는 사람에게도 나타난다. 종족과 상관없이 세계적으로 약 1만7000명당 한 명꼴로 태어나지만,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에서 가장 높은 빈도로 나타난다. 부룬디·탄자니아 등에서는 알비노로 태어난 사람들이 살해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 지역 사람들은 알비노의 팔·다리·머리카락·생식기 등을 제물로 바치면 연애·건강·사업의 운이 잘 풀린다고 믿고 있다. 알비노의 신체를 먹으면 에이즈가 낫는다는 끔찍한 미신도 있다. 알비노를 납치·살해하고 신체를 잘라 매매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알비노들은 아예 보호소에서 경찰의 보호를 받기도 한다.

멜라닌이 없는 알비노는 시력이 약하다. 자외선에 노출되면 쉽게 화상을 입는 데다 피부암도 잘 걸린다. 팔자소관이라지만 원치 않은 유전자로 온갖 고통을 겪는 알비노가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다는 사실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한편, 알비니즘·류시즘과 관련 있는 이자벨리즘(Isabellism)도 있다. 이자벨리즘은 말과 같은 동물의 털이나 새 깃털에 밝은 회색 노란색, 엷은 황갈색, 엷은 크림 갈색 등이 얼룩처럼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1600년대에 이런 색깔을 ‘이자벨라 색(Isabelline)’이라 부른 데서 연유했는데, 이 색깔 이름은 다시 15세기 후반 스페인의 이사벨 1세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그라나다를 공격했는데, 8개월 동안 공성전(攻城戰)이 이어졌고, 오랫동안 갈아입지 않은 이사벨 여왕의 속옷 색깔이 바래버렸다는 것이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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