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광주 청문회 지상중계|"귀가하라"방송 1분 뒤 체포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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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기하 의원(평민)신문
-80년 5월18일 광주 중심 가에 공수부대가 나타나 시위진압을 시작하던 상황은.
『오후3시30분쯤 공수 부대 원들이 유동3거리에서 광주 제일고 입구 횡단보도 앞까지 와 도열한 것이 4시 정각이었다. 스피커를 통해「시민들은 모두 귀가하라」는 방송을 한 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시위진압이 시작됐다』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고 잡아가는 것을 보았는가.
『당시 내가 있던 광주지사사무실에 총검에 칼을 꽂은 2명의 군인이 뛰어들어와 기자실에 있던 세 사람을 마구 때린 뒤 끌고 나갔다. 비명과 신음소리가 났으며 기자실 책상엔 피가 흥건히 괴어 있었다. 또 광주지사의 정훈철 총무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발길로 차 뒤로 넘어뜨린 뒤 개머리판·군화 발·방망이 등으로 무차별 때리고 짓밟아 거의 실신상태에 빠진 것을 양쪽에서 다리 하나씩 잡고 질질 끌고 나갔다.』
-처녀를 트럭에 태워서 때리고 희롱하는 것을 보았는가.
『지서 앞 도청 쪽으로 서 있던 11대의 군 트럭중 맨 뒤 트럭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처녀가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의가 거의 다 벗겨졌고 상의도 가슴이 보일 정도로 찢겨져 전 나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며 공수부대 원들이 두들겨 패며「물건 좋다」면서 희롱했다. 트럭 맞은편 서석병원 사무장이 가운을 이 처녀에게 입혀 주려다 다시 뭇매를 맞았다. 공수부대 원들은 주위의 눈총을 의식, 처녀에게 가운을 입혀서 풀어 줬다.』
-신혼부부를 택시에서 끌어내 마구 때려 신랑이 눈알까지 빠진 것을 보았다고 책에 썼는데.
『택시에서 신랑·신부를 무조건 끌어내려 마구 짓밟고 때릴 때 남자가「아이고 눈이야」하고 비영을 지르는 것은 들었다. 눈이 빠졌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빠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18일 금남 로에서 시위대의저항이 심했다는데 사실인가.『공수부대와 경찰저지선이 압축돼 시위대는 대부분 빠져나가고 소수만 남았으며 구경하는 시민이 많았다. 갑자기「시민을 다 잡으라」고 할 때 달아나느라 돌멩이를 던질 겨를이 없었다』
-18, 19일 공수부대가 연행한 사람들은 실신, 반죽음상태였다는데.
『동아일보지사 앞에 트럭 2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쪽으로 연행 당한 사람들은 모두 피가 묻어 있고 신음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트럭아래서 또다시 이들을 몽둥이 등으로 구타하고 차에 끌어올린 후 고개를 든다는 이유 등으로 또다시 때렸다.』
-임산부를 대검으로 찌르고 학생의 유방을 도려냈다는 소문에 대해 서명원 증인은 근거를 제시했는데….
『나도 당시 그런 얘기는 들었다. 사실을 확인하려고 노력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여학생유방을 도려냈다는 건 21일 계엄사가 유언비어사례로 제시한 것으로 도려냈다는 부분만 강조한 것이다. 대검으로 유방을 찌른 것은 27일 시위진압 후 시체 검인과정에서 직접 확인했다』
◇김운환 의원(민주)신문
-광주항쟁의 발생원인에 대해 지난번 정호용 증인은「과격시위가 먼저 있었고 과격진압이 뒤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했고 윤흥정 증인은「경찰력만으로 충분히 통제가 가능했다」고 상반되게 말했는데 어떻게 보느냐.
『광주사태의 시작을 어디서부터 보느냐에 따라 시각 차가 있다. 공수부대가 전남대에 도착한 것이 17일 오전11시30분인데 이는 시위에 대한 과잉진압을 전제로 한 투입이다. 공수부대가 데모진압에 동원되지 않았다면 광주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또 경찰법력으로만 진압을 했었다면 광주사태는 없었을 것이며 시위자들의 하복부만 때리는 정상적 진압을 했다면 광주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출동중인 공수부대 원이 흥분제·술을 먹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했는데 어떤 종류의 유언비어가 있었나.
『매스컴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갖가지 유언비어와 소문이 난무했다. 환각제를 먹었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공수부대 원의 광주투입 전에 광주에 대한 공포심과 저주 감을 주입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자는 유언비어가 있었는데 공수부대가 경상도군인으로만 편성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경상도사람들의 액센트가 강해 지역감정·피해의식이 겹쳐 풍문이 나돈 것으로 본다』
-사진은 전부 옥상에서 쩍은 것인가. (이때 김씨가 팬티만을 입은 채 끌려가는 장면 등을 담은 사진 2장을 꺼내 보이며 설명).
『이 사진은 옥상에서 망원렌즈로 찍었다. 5월18∼20일은 신변 위협 때문에 근접촬영이 불가능했다.
근접촬영은 군인들이 철수한 20일 이후에야 가능했다.』
◇김문원 의원(공화)신문
-증인이 쓴 10일간의 취재수첩에는 시민들이 20일 밤에 무장을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시민들이 무장한 시기는 21일 새벽쯤이 되지 않았나 본다.』
-작전상보나 전투상보에는 그런 기록이 없는데 어떤 근거로 쓴 것인가.
『20일 밤새 도청 안에서 상황을 체크하고 있을 때 도 간부 8명과 경찰간부 등 이 함께 있었다.
이때 한 간부가「학생들이 예비군무기고를 탈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때 무장이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21일 오전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대치할 때 시위대에서 두서너 자루의 카 빈을 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된 게 21일 오전10시10분이라고 썼는데.
『도성지사 실 복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이 있던 장형태 지사에게「실탄을 지급하는데 큰일」「발포는 안돼야 할텐데 걱정」이라고 말하고 들어갔다.』
-첫 발포는.
『그날 낮 12시58분에 첫 발포가 있었다.』
-애국가를 발포 명령이라고 본 근거는.
『공수부대가 조금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오며 1시쯤 애국가가 스피커로 울려 퍼졌고 그때총소리가 많이 났다. 그래서 신호라 생각했다』
◇신경식 의원(민정)신문
-증인은「취재수첩」에서 광주에만 공수부대가 진주했다고 썼다가『신동아』2월 호에는 서울전주에도 진주했다고 번복했는데.
『당시 확인하지 못했으나 청문회에서 잘못된걸 알았다.』
-동료의원중 한 분은「계엄군이 무장헬기를 동원해 무차별발사, 도청광장에는 시체가 나뒹굴었다」고 했는데 헬기가 사격했는가.
『헬기가 몇 번 왔다 갔다 한 흔적은 있다. 다른 곳은 모르겠고 도청 앞에는 일반군중이 별로 없어 그런 사실이 없었다.』
◇조찬형 의원(평민)신문
-시민의 무장은 21일 새벽에 시작됐다고 증인은 말했는데 어디서 난 무기로 무장했다는 것인가.
『21일 오전 공수부대와 대치한 시위군중의 전위대에서 2∼4자루의 카 빈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실탄의 장전여부는 모르며 이 총으로 사격 했는 지의 여부도 확인하지 못했다』
-공수부대의 정조준 사격은 언제 시작됐나.
『21일 오후1시30분쯤 APC한대가 광장 쪽으로 달려들어갈 때 그 위에 탄 웃통 벗은 청년을 조준 사격한 것이 처음이다.』
-오후1시10분쯤 공수부대가 금남 로 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청년 5∼6명을 앉아 쏴 자세로 조준 사격했다고 했는데 이때의 사망자는.
『청년들이 5∼6명씩 5∼6번 정도 나왔으나 그 25∼30명이 다 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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