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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무제한 … 공연, 파티가 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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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호 24면

세계 최고의 무용단 NDT를 만나다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Marco Goecke, Walk the Demon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Marco Goecke, Walk the Demon

지금 한국 무용계는 세계적인 무용단 NDT(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의 내한공연(19~2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이목이 집중돼 있다. 올해로 설립 60주년을 맞은 NDT는 1999년 예술의전당의 첫 해외 무용 기획공연으로 주목받았고, 2002년 한 차례 더 내한한 이후 16년간 소식이 뜸했다. 22세 이하 유망주를 모은 NDT2의 공연은 간혹 있었지만, 이번에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으로 본진인 NDT1이 오랜만에 다시 초청된 터라 더욱 눈길이 쏠린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NDT를 직접 찾아 세계 초연 작품을 미리 맛봤다.

NDT는 어떤 단체이고, 내한공연은 어떤 의미일까. 현대무용 테크닉을 일상훈련에 도입한 유럽 최초의 발레단이자 ‘모던발레의 대명사’ 이르지 킬리언이 20여 년간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는 팩트만으로 대충 설명이 끝난다. 1977년 서른살 나이로 예술감독을 맡아 발군의 예술적 성취는 물론 유연한 행정 시스템까지 발레계 혁신의 모델이 된 그다. 고전 대작 중심이었던 발레계에 소품 중심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척하고, 젊은 피를 끊임없이 수혈해 무용계에 창의성을 폭발시킨 것이 바로 킬리언이다.

기실 NDT는 첫 내한 전부터 우리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90년대 NDT의 대표 레퍼토리가 영상으로 제작돼 아시아권 안무가들에게까지 영감을 준 것.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이르지 킬리언은 한국 안무가들에게 창작의 모델을 제시한 무언의 스승과도 같았다”고 평했다.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Marco Goecke, Walk the Demon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Marco Goecke, Walk the Demon

킬리언 안무의 특징은 섬세한 발레기교에 인간의 정신세계를 철저하게 분석해 담아내는 방식이었고, 이는 곧 NDT를 넘어 모던발레의 교과서가 됐다. 장 평론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당시 내한작들은 발레와 현대무용의 경계에서 발레의 기술적인 아름다움을 갖고도 자유롭고 감성적인 신체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을 직접 확인해줬다. ‘기교’가 아닌 ‘인간’을 보여준 NDT의 인기는 국내에서 더욱 높아졌고, 안무가들은 더 이상 대놓고 베낄 수 없게 됐다. 이번 공연은 킬리언 이후 NDT가 어떤 식으로 무용계에서 동시대 예술성을 이끌고 있는지 현주소를 확인할 기회다.”

밤이 되면 무지개빛으로 유혹하는 극장

헤이그 스헤브닝겐 해변에 위치한 즈위드스트란드 극장은 밤이 되면 무지개빛으로 변신하며 관객을 초대한다

헤이그 스헤브닝겐 해변에 위치한 즈위드스트란드 극장은 밤이 되면 무지개빛으로 변신하며 관객을 초대한다

이번 공연은 킬리언 이후 2011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폴 라이트풋과 예술고문 솔 레옹 콤비의 ‘세이프 애즈 하우시스(Safe as Houses·2001)’와 ‘스톱 모션(Stop Motion·2014)’, 그리고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상주안무가이자 NDT 객원안무가로 활동중인 마르코 괴케의 ‘워크 더 데몬(Walk the Demon·2018)’ 세 작품을 통해 ‘NDT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준다’는 컨셉트다. 특히 마르코 괴케의 작품은 9월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세계 초연된 따끈따끈한 신작이라 더욱 관심을 끈다. 바로 ‘NDT의 미래’이자 모던발레의 방향성을 일별 가능한 무대기 때문이다.

지난달 29일 이 작품을 현지에서 관람했다. NDT 2018~2019 시즌 개막작이 공연된 곳은 헤이그 스헤브닝겐 해변의 즈위더스트란드(Zuiderstrand) 극장. ‘네덜란드 유일의 해변 극장’으로 명성이 높다. 시내에서 버스로 20분쯤 달린 후 다시 15분쯤 걸어가니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 항구가 나온다. 해수욕 시즌이 지난 바닷가에 오후 6시쯤 도착하니 항구와 다소 어울리지 않게 오도카니 서 있는 극장엔 개미 한 마리 얼씬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해변에 딱 하나 있는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일몰을 구경하다 보니 어둑한 저녁. 차갑게만 보이던 극장의 노출 콘크리트 외벽이 어느새 무지개빛으로 변신하며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네덜란드 번화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전거 군단’이 만만치않은 기세로 이 외딴 극장에 몰려들고 있었다.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Hofesh Shechter, Vladimir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Hofesh Shechter, Vladimir

극장 안은 스탠딩 파티 분위기다. 일찌감치 도착한 관객들이 로비를 가득 메우고 커피와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음료값을 어디서 내냐고 물으니 티켓값에 포함돼 있단다. 바가지를 씌워도 꼼짝 못할 해변 극장에서 ‘무료 음료 무한 제공’이라니, 과연 파티 할 만 하다 싶었다. 객석엔 어린이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인, 휠체어를 탄 장애인까지 ‘관객층’을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로 빼곡하다.

30분짜리 3번의 공연 사이 20분짜리 2번의 인터미션에도 객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극장 구석구석에서 ‘스탠딩 파티’가 계속되니, 무용을 보러 온 건지 파티에 온 건지 헷갈린다. 이들에게 무용은 심각한 의미찾기가 아니라 여유로운 저녁시간의 즐길거리이자 생활의 일부인 것이다.

우아한 몸짓과 자유로운 에너지의 조우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Hofesh Shechter, Vladimir

ⓒRahi Rezvani, Nederlands Dans Theater, Hofesh Shechter, Vladimir

시즌 개막작의 라인업은 예술감독 폴 라이트풋-솔 레옹 콤비의 ‘싱귤리어 오딧세이(Singuli<00E8>re Odyss<00E9>e·2017)’와 마르코 괴케의 신작 ‘워크 더 데몬’(2018), 이스라엘 안무가 호페쉬 쉑터의 신작 ‘블라디미르(Vladimir·2018)’로 이어졌다. 세 소품은 겹치기 출연하는 무용수들을 빼곤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전혀 다른 세 가지 안무 언어를 하룻밤에 소화하는 무용수들이 마치 3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통역사처럼 보였다.

‘싱귤리어 오딧세이’는 킬리언의 안무언어를 계승한 모던발레의 전형이었다. 오래된 기차역 세트를 지어놓고 맞춤으로 작곡된 막스 리히터의 쓸쓸한 음악 속에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춤으로 승화시켰다. ‘군중속의 고독’의 표현인 듯, 칼군무를 춰도 외로워 보이는 이들의 동작은 발레의 기본에 충실하다. 우아한 몸짓들은 자유로워 보여도 지배적인 인상을 만드는 건 빈틈없는 군무다. 발레의 우아함과 현대무용의 에너지의 조우 그 자체랄까.

마르코 괴케의 ‘워크 더 데몬’은 좀 더 현대무용에 가까웠다. 관객들이 와인을 마시는 사이 기차역 세트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텅빈 무대, 마음 속에 잔뜩 낀 구름인 양 자욱한 연기 속 감미로운 노래에 맞춘 파드되는 가려진 내면의 표출이다. 스타카토처럼 똑똑 끊기는 빠르고 분절적인 움직임이 분주하게 이어지고, 제목 그대로 시커먼 ‘데몬’이 무용수 사이를 기어다닌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동작은 분절적이면서도 물흐르듯 유연하고, 이질적인 ‘데몬’의 존재마저 무리없이 그림에 녹아든다.

목소리의 비중도 두드러진다. 가사가 있는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고, “끝없이 내면을 향하지 않는다면 춤은 결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괴케의 철학을 구현하려는 듯 무용수들은 내면을 토하는 소리를 낸다. 헉헉거리거나 으르렁거리고, “땡큐” “헬로” “굿바이”를 주문처럼 외우기도 한다. 괴케의 말대로 “모든 삶과 사랑은 결국 ‘땡큐와 헬로, 굿바이’”라는 걸까.

호페쉬 쉑터의 ‘블라디미르’는 객석을 뒤흔드는 요란한 에너지로 넘치는 특유의 스타일 그대로다. 웅장한 타악 베이스의 음악이 점점 강렬해지며 움직임도 한바탕 굿판이나 스페인 집시춤처럼 정열을 더해 간다. 영화 ‘웨스트사이드스토리’의 이유없는 반항처럼, ‘춤, 너는 자유다’라고 외치는 완전한 현대무용이었다.

NDT가 세계 최고가 된 건 이런 포용력 때문 아닐까. 다가올 내한공연에서도 괴케의 신작은 파격의 포용으로 다가올 것이다. 장 평론가는 “괴케 안무의 특징은 분절과 유연의 조화”라면서 “동작뿐 아니라 얼굴 표정, 대사 등 직접적인 표현도 두드러진다. 모던발레가 컨템퍼러리발레로 발전하면서 움직임보다 감성연기에 치중하게 된 흐름이 잘 담긴게 그의 안무”라고 짚었다. 맨발의 단원들 간에 서열도 없지만 토슈즈를 신은 듯 정교하고 우아한 몸짓을 구사하는 NDT는 더이상 발레와 현대무용의 구분은 무의미해졌음을 웅변하고 있다.

헤이그(네덜란드) 글·사진 유주현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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