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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고 명쾌하다, 무사의 칼처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05호 27면

WITH 樂: 올레그 카간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올레그 카간의 1979년 실황을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중 두 개의 파르티타.

올레그 카간의 1979년 실황을 녹음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중 두 개의 파르티타.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셨는지 모르겠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남자가 감옥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다. 오래전 영화여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던 교도소 장면은 여전히 선명하다. 살풍경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 아리아. 죄수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낡은 스피커에 빨려들어간다. 영화에서는 수감자의 입을 빌어 이 노래의 느낌을 전한다.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들어 모든 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아주 짧은 한 순간 우리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예술이 가진 효용에 대한 가장 명쾌한 설명인 것 같다.

가끔 현실이 창살 없는 거대한 감옥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신지. 몸은 지치고, 일은 끝이 없고, 부담감은 커지고, 딱히 탈출구는 안 보이고, 다들 이런 슬럼프가 있지 않은가? 뉴스를 들여다보면 치솟는 부동산 가격이, 높은 취업 장벽이, 위태위태한 노후가, 불안한 우리의 영혼을 쥐고 흔든다. 작아져 가는 나를 본다.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예술이 필요하다. 잠시나마 우리를 담장 밖 넓은 세계로 이끌 음악. 자기 배려를 위한 음악이라 해도 좋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덕에 자질구레한 일상의 번뇌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적이 있다. 대담하고 명쾌한 연주였다. 블랙홀처럼 번잡한 생각들을 빨아들이는 마법 같은 연주. 연주자와 음원을 알아내기 위해 라디오를 끝까지 들었다. 올레그 카간의 1979년 모스크바 실황이었다. ‘아니, 이게 라이브 녹음이었다니 ’. 기술을 넘어서는 단단한 테크닉에 놀랐고, 라이브여서 오히려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던 대범함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카간은 실력에 비하면 인기가 높은 편은 아니다. 그는 70~80년대 소련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바이올린의 전설 오이스트라흐의 제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실내악 파트너이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래머와 자웅을 겨뤘던 걸 생각하면 현재의 무관심은 박하다.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고 메이저 음반사에서 녹음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는 바이올린의 성경과도 같다. 바흐는 이 작품에서 바로크식 퓨전을 시도한다. 느렸다 빠르기를 반복하는 바로크식 소나타와 춤곡을 모아놓은 것부터가 그렇다. 이탈리아풍의 선율과 독일의 다층적 화성을 하나의 악기로 표현해보겠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흡입력 강한 카간의 연주는 맑은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운처럼 통쾌하다. 그의 활은 무사의 검처럼 머뭇거리지 않고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간다. 바흐가 한 대의 악기로 엄밀함와 유연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처럼.

모음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은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다. 한마디로 예술이다.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를 둘러싼 담장 뒤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지 생각해볼 법하다. 음악이 우리를 초월하게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79년 카간의 음반이 전곡 녹음이 아니라는 점과 현재 음반을 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행히 음악은 다른 경로로 쉽게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처음 듣는 사람들이 꼭 하는 질문 하나로 마무리하자. 나 역시 했던 질문이니까. “혹시 이거 두 사람이 연주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다. 혼자 연주한다. ‘더블 스토핑(Double stopping·현악기에서 동시에 여러 음을 내는 기법)’이라고 검색하거나 동영상 사이트를 참고하시면 된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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