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자 없는 미·중 무역전쟁, 미 중간선거가 1차 분수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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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호 02면

[SPECIAL REPORT] 미·중 보복관세 100일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시진핑·트럼프 ‘강대강’ 대결 #‘패권 충돌’ 타협 어려운 중국 #부도 채권 늘고 수출 쇼크 우려 속 #악영향 3분기 이후 현실화될 수도 #경제 이익 아닌 국가 전략의 문제

지난해 미국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정치학)가 펴낸 책이다. 그는 책에서 글로벌 G2인 미국과 중국 사이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견했다. 두 나라가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져 서로 원치 않는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함정은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당시 G2인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갈등을 피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따온 말이다.

앨리슨의 책 제목이 이제 현실이다. 미·중이 지난 6월 군사 영역이 아닌 무역에서 전쟁을 시작한 지 석 달이 흘렀다. 경제적 시간 구분의 최소 단위인 한 분기다. 경제 현장에서 이런 저런 증상이나 사건이 일어날 만한 시간이 흐른 셈이다. 실제 현장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국내 대기업의 중국 무역 담당인 홍모 이사는 “중국 정부가 빚 줄이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무역전쟁이 시작됐다”며 “민간 기업 경영자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다”고 말했다. 경영자의 심리적 위축은 생산활동에서도 확인된다. 경제분석회사인 차이신/마켓이 조사한 지난달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0이었다. PMI 지수는 50을 웃돌면 생산활동 활력 증가를, 밑돌면 활력 둔화를 의미한다. IHS마켓의 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라지브 비즈워스는 최근 취재기자와의 대화에서 “중국 PMI 지수는 지난 8월까지 15개월 연속 상승했다”며 “생산활동 활력이 경계선에 이른 셈”이라고 설명했다.

위안화 가치 떨어져 기업인들 다소 숨통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겉으로 드러난 중국 수출은 꾸준한 흐름이다. 올 들어 중국 수출은 일 년 전과 비교해 9~11% 증가했다. 월 평균 200억 달러 이상의 무역수지 흑자를 꾸준히 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공격을 무색하게 하는 수치다. 대중 무역 수출 담당인 홍 이사는 “트럼프가 중국산에 보호관세를 부과했지만, 위안화 가치가 올 들어서만 10% 정도 떨어진 게 중국 수출 기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민간 기업인의 심리가 위축되고 생산활동이 시원찮은 이유는 무엇일까. 비즈워스는 “중국 수출 기업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6개월 뒤 수출을 가늠해볼 수 있는 수출 주문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수출 주문은 중국 정부의 공식 통계에선 잘 나타나진 않는다. 비즈워스에 따르면 트럼프가 중국산 2000억 달러에 대한 관세를 10%에서 25%로 올릴 내년 1월이 가까워 올수록 수출 주문이 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수출 쇼크 가능성 와중에 기업들의 부도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달 26일 상하이 금융결제소에 따르면 올 들어서만 기업 24곳이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다. 부도난 채권 액수만도 567억 위안(약 9240억원)에 이른다. 이는 증권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채권만을 기준으로 한 통계다. 지난해는 약 200억 위안 수준이었다. 부도 금액이 두 배 넘게 늘어났다. 로이터 통신은 이날 전문가의 말을 빌려 “부도 증가가 무역전쟁 탓인지, 아니면 중국 정부의 긴축 탓인지를 놓고 경제 분석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쇼크 전망은 주가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상하이종합주가 지수는 올 들어서만 15% 넘게 하락했다. 무역전쟁 심화가 낳은 수출기업 실적 악화가 주가에 미리 반영된 셈이다. 박상현 리딩투자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의 보호관세 공격에 중국 경제가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의 공식 성장률은 눈에 띄게 하락하진 않았다. 올 2분기 성장률은 6.7%(지난해 같은 기간 기준) 정도였다. 올 1분기 6.8%에서 0.1%포인트 낮아졌다. 비즈워스는 “올 2분기 성장률엔 무역전쟁 충격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올 3분기 이후론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역전쟁 타격이 분명히 드러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타협에 나설까. 적잖은 전문가들이 트럼프가 중국산 2000억 달러에 관세를 부과하는 반면 시진핑은 미국산 600억 달러에 보복관세를 매긴 점을 들어 시진핑의 공격력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시간이 흐르면 시진핑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물러날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런데 스티브 로치 예일대 교수(경제학)는 지난달 홍콩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이번 무역전쟁의 원인을 “단순한 일자리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가 번영의 ‘성배(聖盃)’, 즉 혁신과 기술을 둘러싼 전략적인 충돌의 문제”라고 분석했다. 1963년 치킨 대전이나, 81년 일본 압박, 93년 바나나 전투 등처럼 경제적 이익을 겨냥한 분쟁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영국 식민지 패권에 독일이 도전하다 벌어진 1차대전에 가까워 보인다. 미·중 정부 당국자가 나서 타협할 여지가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중 정상 모두 국가주의적 성향 지녀

실제 요즘 미·중 정부 간 대화는 지지부진하다. 지난달 말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미 무역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경제 안보 분야의 양국 관계 악화를 그대로 놓아둔다면 40년간의 중·미 수교 성과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며 “양국은 평등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말처럼 녹록하지 않다. 마땅한 중재자도 없다. 중재자 역할을 할 만한 유엔 등 국제기구는 실질적 힘이 없다. 양국 지도자 모두 물러설 줄 모른다. 무역전문가 켄 로버츠는 지난달 말 경제전문지 포브스 기고문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모두 국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지도자”라며 “두 강대국 간의 무역전쟁이 점차 누그러질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징후들이 더 많다”고 진단했다.

중국 쪽은 일단 다음달 6일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지켜보자는 쪽이다. 중국 경제관료들과 이코노미스트들은 트럼프가 중간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중국 때리기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예상 또한 한낱 기대일 수 있다. 적잖은 전문가들이 트럼프가 중간선거에서 패하더라도 무역전쟁에서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로치 교수는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무역전쟁에서 출구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며 “중국과 미국이 ‘신냉전(a new cold war)’ 상황에 빠져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 전문가인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무역전쟁이 결국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며 “미국이든 중국이든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KB증권은 미·중 무역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분쟁이 격화될 경우 글로벌 경제의 연간 성장률을 당초 전망 대비 0.7~0.8%포인트가량 하락시킬 수 있다”고 관측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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