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 기부 말해 놓고 투자국 정부 비판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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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5월 24일자 2면> 불과 한 달 전 서울에서 "1000억원을 기부금으로 내겠다"며 민심 달래기에 나섰던 것과는 딴판이다.

그레이켄 회장의 이날 발언은 치밀한 사전 계산이 있어 보인다는 게 금융계의 시각이다. 우선 난데없는 기자회견이 그렇다. 말을 극히 아끼는 것으로 알려진 사모펀드 회장이 공개석상에서 투자국을 비판하는 것부터 이례적이란 것이다.

그레이켄 회장은 "한국 검찰이 반(反)외국자본 정서에 편승해 수사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반외국자본 정서가 사라져야 한국 투자를 재개할 수 있다"고도 했다. 현장에 모인 외국 언론들이 들으면 '한국은 외국인이 투자하지 못할 나라'란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발언을 '한국 정부 압박용'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국계 은행의 한 임원은 "론스타가 지난달 이른바 '먹튀(큰 이익을 얻은 뒤 세금도 내지 않고 튀는)' 논란에 대해 사과했으나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자 반대로 (한국 정부와의) 정면승부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론스타 본사 관계자는 24일 "서울 회견 후에도 한국의 여론이 바뀌지 않아 기존 투자자들이 '론스타의 도덕성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강하게 해명할 것을 요구해 뉴욕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해명했다.

금융계에선 론스타가 외환은행 매각이 사실상 모두 끝난 것으로 판단, 그간 수세 일변도에서 적극 공세로 전환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이달 19일 론스타는 국민은행과 외환은행 매각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4개월 뒤까지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국민은행과 재협상을 하기로 한 만큼, 한국 정부가 그때까지 시간을 끌 수 없도록 국제 여론을 동원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레이켄 회장이 "올 여름께 수사가 마무리되기를 기대한다"며 검찰의 수사 기간까지 주문하는 '무례함'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란 것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그동안 아무런 편견 없이 공정하고 신중하게 수사를 해왔다"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외국자본의 투자가 검찰 수사로 위축되거나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투기자본감시센터의 허영구 대표는 "100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투자국 정부를 비판하는 건 무슨 경우냐"며 "한국에서 고립되자 월가의 자본력에 기대어 정부를 위협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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