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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중앙신인문학상] 시 심사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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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홍삼득의 '생각 2'는 반복적 율동에 의지한 조금 단순한 구조이지만 이른바 시를 만들 줄 아는 솜씨가 빛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약점은 그 변화의 추이에만 모든 감각과 시선을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상상력이 그만 "나는 생각들 속에서/생각을 호흡하며…산다" 는 식으로 사유의 단순구조에 사로잡힌 것에 유의하지 않은 점이다. 그러나 심사자들은 '연두색 벌레'를 비롯해 그의 다른 작품도 모두 시를 향해 섬세하게 열려 있음에 주목했다.

응모작 중 사유의 복잡다기함과 변환에 능한 작품은 이호준의 '상징들'이었다. 그의 시는 선행시(先行詩)인 조정권의 '산정묘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낡은, 죽음이 가득한 세계를 가장 다채로운 언어로 은유하면서 우리를 상상의 한 극점까지 몰고 간다. 이 거침없는 언어를 보라.

"나는 낮은 하현(下弦)/사령(死靈)들의 윤무(輪舞), 혀 달린 메타포/생명의 초라한 환유/부질없는 맹세의 램프, 나는"

한자어를 돌올하게 내세우는 것이 좀 거슬리지만-역으로 그것도 그의 시의 특장일 수 있겠으나-그리고 어느 외국 번역시를 읽고 있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의 상상력은 그침을 모르는 바람처럼 몰아치면서 이 '가짜 항성'의 '회색 여행자'의 '일그러진 외눈'으로 이 시대의 모든 불모의 징후를 명징하게 읽어낸다.

그리하여 이 여행자의 시선에 돋을새김된 세계는 "바람이 불기 전에/떠날 채비를 하는 모래의 영혼과/비 내리기 전에 잠드는 불의 영혼"들이 이글거리는, 즉 "죽음의 고요함"이 끓어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명하고 멈출 줄 모르며 언어의 두려움을 너무 모르는 넘치는 재기 앞에서 심사자들은 한편으로 감응하면서도 곳곳에 과장된 감정의 덩어리들이 제어되지 않은 채 노출돼 작품의 균일한 성취를 방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김재홍의 '메히아'는 일견 평범한 시다. 아니 앞의 '상징들'과 비교하면 비유도 좀 어눌해 보이고 언어도 매끄럽지 못해 평범의 극치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두번.세번 소리내 읽다보면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는, 유머와 기지를 속으로 감추고 있는 시다. 이호준의 시가 정색을 하고 쓴 시라면 '메히아'는 짐짓 아닌 척하면서 허술한 표정으로, 그러나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앞의 시와는 시적 전략이 다른, 평범을 가장한 시다.

첫 구절부터 보라.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출신 시민이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였던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 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서게 된 경위에 대한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사실 묘사부터가 벌써 웃음과 연민을 동시 유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 시는 시종일관 이 웃음과 연민의 이중 기조를 잃지 않으면서 '메히아'라는 머리통이 매우 작고, 2루타를 날린 적이 있으며, 비쩍 마른 눈의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그리고 늘 타석에 서면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 인물을 살아 있는 시적 형상으로 창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사자들은 숙고 끝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면서, 동시에 그의 다른 작품인 '평상(平床)' 등에서 확인된, 이 땅의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한 한편으로 미더운 시적 기량이 너무 손쉽게 민중주의적인 인물형상의 탐구에만 매몰되지 않기를, 즉 오늘의 도시민의 피로한 일상 또한 간파할 줄 아는, 산뜻한 현대 시인으로서의 세련된 미적 근대성 또한 갖추게 되기를 특별히 당부하기로 했다. 그 길만이 오늘날 도처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민중적 정서가 건강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독자적(주관적)인 나머지 "소리를 반사하는 침묵이 선명하다"는 등의 객관적 인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의 전개가 전체적으로 모호하여 물의 형상을 통한 몸의 탐구라는 시적 주제가 효과적으로 살아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앞의 '메히아'를 압도할 만한 결정적인 새로움이 없었다.

한편 배호남의 '좋은 날'도 매우 아름다운 언어의 그늘을 드리운 작품이었으나 바로 그 '작품됨'이 너무 구투였음을 밝힌다. 응모자 여러분의 건투를 빌면서!

◇심사위원=김혜순.이시영(집필:이시영)

◇예심위원=고형렬.김경미.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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