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중앙신인문학상] 소설 심사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6면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그러나 더 나아지지는 않았다. 지난 십여 년에 걸쳐 우리의 삶이 맞이한 변화를 요약하듯, 이번 신인상의 소설 부문 심사소감도 이런 말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예심을 통과한 9편의 작품 가운데 태반의 작품이 소재에서 새롭고 구성에서 특별했으나 내용은 진부하고 결말은 오히려 소심한 편에 속했다. 삶에 새로운 글을 바치고 싶어 했으나 삶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드물었다는 뜻이 되겠다.

심사위원들은 '찌''유자''녹두밭에 앉지 말기''모호함에 대하여' 등 네 편의 작품에 주목하였으며, 그 가운데 '모호함에 대하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찌'는 악의 구조적 성격을 드러내는 주제가 진지하고 미스터리적 구성으로 일정한 흡인력을 얻어냈으나 그 구성이 탄탄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묘사력이 빈약하여 하나의 모호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는 데 그쳤다. 소설이 사실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에 대한 이해도 깊이를 누리기 어려울 것이다.

'유자'는 전형적인 예술가 소설에 속하나, 이 주제를 한 이단종교의 신앙체계에 대입하는 진술 양식이 이채로웠다. 필경 실재하지 않을 이 종교의 얼개를 만들어내고 그에 합당한 용어를 고안하기 위해 응모자가 쏟아 부은 노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곧 주인공이 예술적 능력을 얻고 예술가로 살기로 결심하는 대목이 매우 조급하게 처리된 탓에 설득력이 부족하여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셈이 되었다. 이는 주인공이 들어선 것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경지에 작가 자신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녹두밭에 앉지 말기'는 한 여자의 생애를 그녀가 남긴 장롱으로 표상하는 착점이 돋보였고 문장에서도 오랜 훈련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여러 요소에 먼저 흐릿한 윤곽을 제시하고 그 세부를 채워나가는 수법도 작품을 기름지게 했다. 그러나 서사의 지력선이 약했으며 소재에 대한 해석의 깊이도 충분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화자는 어머니가 남긴 장롱의 처리를 놓고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데, 그 장롱을 간직할 수 있는 힘도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힘도 그 장롱 속에서가 아니라면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화자가 어머니의 삶을 제 삶에 끌어들이지 못한 것처럼, 작가도 스스로 애써 창안한 장롱을 끝까지 이용하지 못했다.

당선작 '모호함에 대하여'는 삶의 모든 경험이 전자통신망으로 간접화된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한 젊은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을 경쾌하면서도 고통스럽게 그리고 있다. 문체가 개성적이며 이야기의 구성도 균형을 누리고 있다. 주제에 대한 넓은 지식도 이 소설의 세부를 풍요롭게 하였다.

결말에 상투성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어서 새로운 경험을 이미 익숙해진 경험으로 번역하고 말았다는 불만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이 소설의 강점을 크게 해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강점은 문제의 해결에 있기보다 현실의 핵심을 짚어 진정한 문제를 찾아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선자의 문운과 모든 투고자들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김치수 박범신 황현산(집필:황현산)

◇예심위원=권명아 김형경 심상대 장영우 한창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