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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편집국장레터]전직대통령의 '넉넉한' 유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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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호 면

 피고인이 다스의 실소유자이고 비자금 조성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넉넉히 인정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정계선 부장판사는 5일 이명박 전 대통령 1심 선고 공판에서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원.

다스 자금 횡령과 삼성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달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 공판을 마친 뒤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스 자금 횡령과 삼성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달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결심 공판을 마친 뒤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VIP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한 명의 전직대통령이 유죄를 받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봤습니다.
재판부의 판결문에서 “넉넉히”라는 형용사가 특별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감정이나 정서가 배제돼야 할 판결문에 등장한 형용사인 만큼 심상하지 않았습니다. 넉넉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사전은 ‘크기나 수량 따위가 기준에 차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풀어 놓았습니다. 유죄라는 기준에 차고 남았다는 의미로 재판부는 이 형용사를 동원했을 겁니다.
공교롭게도 “넉넉히”라는 이 형용사는 6개월 전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선고공판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김세윤 부장판사는 지난 4월6일 공판에서 “피고인(박근혜)이 최서원(최순실) 부탁을 받고 5대 거점 체육인 육성지원사업을 요구해 직권남용과 강요죄가 넉넉히 인정된다”라고 판결했습니다.
한때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당위와 부담 사이에서 재판부가 느꼈을 심리적 압박감이 ‘넉넉히’라는 단어 속에 담겼는지도 모릅니다. 권력의 끝이 늘 이렇게 비극으로 종말지어져야 하는지 또 한번 비감함을 느끼는 날입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최근 한반도 비핵화 등 정세 관련 내신 기자 브리핑에서 종전선언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최근 한반도 비핵화 등 정세 관련 내신 기자 브리핑에서 종전선언 관련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라 밖으로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비핵화 게임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던진 말 한마디가 작지않은 파장을 낳고 있습니다. 강 장관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다른 접근법을 원한다(We want to take a different approach)”며 ‘북한에 대해 핵무기 목록신고를 요구하는 걸 미국이 일단 보류하고, 북한의 (영변 같은)핵 시설 폐기를 다음 과정으로 삼자’고 제안했습니다. 강 장관은 그 이유로 “처음부터 핵무기 목록을 요구하면 이후 검증을 놓고 이어질 논쟁 때문에 협상을 교착 상태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5일 백그라운드 브리핑에서 강 장관의 제안을 “새로운 접근법”, “창의적인 접근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강 장관의 제안은 위험한 도박과도 같습니다. 북미 비핵화 게임의 중재자를 자임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북한 쪽을 거드는 듯한 제안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런 만큼 강 장관의 제안은 김정은이 내민 카드를 받고 미국은 종전선언을 해주는 것으로 주고받기를 하자는 겁니다. 존 볼턴 같은 미국의 강경 매파들은 김정은이 비핵화 협상에 임하는 진실성의 중요한 잣대로 핵무기 목록 제출과 국제기구에 의한 사찰 허용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제안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강 장관은 비핵화 협상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장관 인사청문회 시절 다자외교만 경험했지, 한미회담 같은 양자외교를 경험하지 못한 걸 야당이 문제삼았을 정도로 외교부 내 미국 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강 장관이기에 ‘창의적인 접근법’의 후견인은 청와대일 수 있습니다.
이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인다면 그 것보다 반가운 건 없습니다. 말 그대로 트럼프와 김정은 사이에 놓인 가장 큰 걸림돌이 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일 경우엔 중재자로서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도 있는 사안입니다. 청와대는 강 장관의 제안을 ‘새롭고, 창의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선 ‘위험하고, 대담한’ 제안입니다.
답은 미국이 쥐고 있습니다. 내일(6일) 네번째 방북하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김정은으로부터 비핵화와 관련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다면 강 장관의 제안은 북미 비핵화 협상의 속도를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반면 반대 쪽이라면 미국은 더 이상 중재자로서 문재인 정부를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 방문에서 돌아올 때까지 조마조마한 시간을 버텨야 합니다. 우리가 주체가 되지 못하는 외교 게임은 그래서 늘 살얼음판입니다.

지난 주 중앙SUNDAY는 ‘자동차의 미래: 전기차와 수소차’ 기사를 스페셜리포트로 다뤘습니다.
아파트 청약보다 치열한 휴양림 예약 경쟁 소식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번 주 중앙SUNDAY는 이명박 전 대통령 1심 선고공판 소식과 3대(代)에 걸친 지질학자 얘기를 스페셜리포트로 담았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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