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선발 후보에서 1선발로...류현진의 반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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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31, LA 다저스)이 빼어난 피칭으로 위기를 넘길 때마다 클레이턴 커쇼(30)는 더그아웃에서 박수를 쳤다. 류현진이 타석에서 안타를 치자 커쇼는 오른팔을 높이 들어 응원했다. 류현진이 투구수 104개로 7이닝을 마치자 커쇼는 그를 꽉 끌어안았다. 존경과 감사를 담은 행동이었다. 올해 다소 부진하긴 했지만 ‘지구 최고의 투수’라는 커쇼도 류현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5선발 경쟁하다 포스트시즌 탈락 #1년 만에 커쇼 제치고 포스트시즌 1선발 #7이닝 무실점 완벽투로 1차전 승리투수

류현진이 7회를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오자 클레이턴 코쇼가 그를 꼭 끌어안고 있다. [연합뉴스]

류현진이 7회를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오자 클레이턴 코쇼가 그를 꼭 끌어안고 있다. [연합뉴스]

류현진이 ‘다저스 1선발’ 데뷔를 환상적으로 마쳤다. 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1차전을 7이닝 4피안타 8탈삼진 무실점으로 막고 승리투수가 됐다. 까다로운 애틀랜타 타선을 상대로 다저스 에이스의 위용을 보였다.

류현진의 이날 등판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상당히 큰 뉴스였다. 지난 5년 동안 다저스의 포스트시즌 1선발은 ‘당연히’ 커쇼였다. 기량이나 상징성 모두 커쇼를 대체할 만한 선수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류현진은 9월 29일, 커쇼가 30일 등판을 끝으로 정규시즌을 마쳤다. 커쇼가 나흘을 쉬고 5일 경기에 등판할 거라는 게 미국 미디어의 예상이었다. 류현진이 엿새를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 같았다.

그러나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과 릭 허니컷 투수코치의 결정은 예상을 빗나갔다. 어쩌면 류현진이 지난달 29일 샌프란시스코전에 등판했을 때 류현진의 5일 등판이 예정돼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류현진은 단지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을 뛰어넘는 ‘다저스 1선발’의 지위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류현진은 사타구니 부상 때문에 정규시즌에서 82와3분의1이닝(7승3패)만 던졌다. 대신 투구 품질이 매우 뛰어나 평균자책점은 1.97에 불과했다. 규정이닝을 채웠다면 메이저리그 전체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커쇼는 올 시즌 9승5패 평균자책점 2.73이었다.

류현진이 아무리 좋은 피칭을 보였다 해도 커쇼 대신 1선발로 나서는 건 매우 큰 의미가 있었다. 감독과 코치는 커쇼의 자존심을 꺾는 결정을 한 것이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류현진이 잘 던지면 그만큼 입지가 강화되겠지만, 못 던지면 (2차전에 던질 때보다) 더 큰 부담을 지게 된다”고 말했다. 류현진은 커쇼와 류현진의 순서를 바꾼 코칭스태프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커쇼는 1차전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류현진은 대단한 시즌을 보냈다. 나는 내일 내 차례에 나갈 것이다. 류현진이 내게 ‘1차전 선발이냐’고 묻어서 ‘내가 아니라 너’라고 말해줬다”고 답했다. 커쇼는 “그들(감독과 코치)에겐 류현진을 1차전에 내보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난 그걸 받아들였다”라고 말했다.

류현진은 1차전 피칭에서 환상적인 피칭을 했다. 구위뿐 아니라 안정감을 볼 때 모든 감독이 갖고 싶은, 에이스다운 퍼포먼스였다. 류현진은 “1차전을 등판을 준비하라는 얘기를 듣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준비는 다 된 것 같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리고 준비된 모든 걸 보여줬다.

류현진은 2015년 왼 어깨 수술 후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재활훈련 후 지난해 메이저리그로 돌아와서는 ‘5선발 후보군’으로 밀렸다. 다저스의 넘치는 선발진에서 류현진을 비롯해 마에다 겐타 등 5선발 후보들은 서로 부상자명단에 오르며 ‘변칙 선발등판’을 했다.

지난해 5월 26일 세인트루이스전에서 류현진은 6회 구원등판 해 4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빅리그 진출 후 첫 세이브를 따냈다. 그러나 류현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불펜으로 밀렸다는 실망감이 엿보였고, 4이닝을 워낙 잘 던진 덕분에 다시 ‘5선발 후보’로 돌아갔다. 류현진은 지난해 5승9패 평균자책점 3.77을 기록했다. 재활 후 첫 시즌으로는 괜찮은 성적이었다. 그러나 로버츠 감독은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 류현진을 제외했다. 류현진은 “열심히 준비했는데 실망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년 류현진은 포스트시즌 1차전에 등판했다. 5월부터 3개월 동안 사타구니 부상 공백이 있었으나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올 시즌 뒤 FA 자격을 얻는 그를 두고 “선발진이 두터운 다저스를 떠날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들이 전망이 쏟아졌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왼쪽)이 5일 경기에서 승리하자 류현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하하고 있다. [연합뉴스]

데이브 로버츠 감독(왼쪽)이 5일 경기에서 승리하자 류현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규시즌 마지막 3경기에서 류현진의 위상이 확 달라졌다. 9월 18일 콜로라도전 7이닝 무실점, 24일 샌디에이고전 6이닝 무실점, 29일 샌프란시스코전 6이닝 1실점을 기록하며 다저스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로버츠 감독은 “내가 몇 년 동안 본 결과 류현진은 ‘빅게임 피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류현진이 디비전시리즈 1차전에서 그걸 똑똑히 증명했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다저스가 그토록 간절하게 찾았던 ‘빅게임 피처’가 바로 류현진이었다.

1년 만에 놀라운 반전을 만든 류현진. 그가 올 가을(포스트시즌 남은 등판)과 겨울(FA 계약)에 또 어떤 일을 낼지 모른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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