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공통의 추억」만드는 가족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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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한국의 가정은 후기 산업사회로 진전되면서 이제 가족의 의미가 부부와 자녀들만의 직계가족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출세하고 돈 잘 버는 남편, 아름답고 능력 있는 아내, 공부 잘하는 건강한 자녀」는 현대가정의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 이제 가정은 각 가족구성원이 치열한 경쟁만이 있는 비정한 사회에 나가 싸워 얻은 노획물을 공유하며 새 힘을 키우기 위한 안식처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주로 도시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최근 변모하고 있는 가정의 새 풍속도를 살펴보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본다·<편집자주>
구랍31일 오후, 종무식을 마친 J사 중견간부 이원일씨(45·서울 서초동)는 서둘러 가족들과 합류, 부산항 새마을호에 몸을 실었다.
정택(13)·영주(11)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부산해운대에서 새해를 맞는 것도 이번이 세 번째.
검푸른 바다를 가르고 솟아오르는 붉디붉은 해를 온 가족이 함께 바라보며 새해소원을 빌어보는 일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가족행사가 됐다.
해맞이와 범어사 구경으로 새해 첫날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일찍 태종대를 찾아 나서 바다구경을 즐긴 이씨 가족은 오랜만에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하며 2일 밤늦게 서울역 광장을 빠져 나왔다.
『아내도 영양사로 직장엘 나가고 있어 가족이 함께 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 모처럼 집에서 지낼 경우 생활리듬이 깨어져 피로가 더 쌓일 성싶어 신년여행을 생활화하기로 했지요. 장남이라 차례를 모시는 문제가 있어 가족회의 끝에 음력설에 지내는 것으로 타협을 봤습니다.
집이 아파트인 덕택(?)에 며칠간 비워두어도 안심할 수 있다는 여건도 보탬이 됐다고 이씨는 들려준다.
「즐기며 살자」는 의식변화의 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이 같은 가족동반여행은 최근 1∼2년 사이에 부쩍 늘어나고 있다.
정초연휴에 남편과 함께 2박3일 코스로 설악산을 찾았던 신재영씨(26·서울 이문동)는 『부부끼리, 혹은 자녀와 함께 여행 온 이들로 장사진을 이뤄 속초 음식점에선 생선회가 동이 날 지경이었다』고 전해주기도 했다.
정부의 해외여행자유화조치로 가족동반 여행 붐은 해외로까지 확산돼가고 있는 추세. D사에 재직중인 고동수씨(48·서울 일원동)는 회사산악회에서 4박5일 여정으로 대만행을 떠나기로 하자 부부동반을 고집, 아내와 함께 대만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고씨는『남편이 잘되기만 바라면서 군소리 없이 대학신입생·고1년생의 두 아들을 잘 키워 낸 아내에게 그간 나 혼자 즐기고 다닌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요즘 들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돼 함께 외국여행을 갈 생각을 했다』고 들려주고,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부동반을 강행한 이들이 5쌍이나 됐다고 말했다.
세중여행사 이재중 이사는 『신정연휴 때는 비행기 좌석이 모자라 여행객을 다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러시를 이루었다』면서 국내 3백80여 곳의 여행사가 실시하고 있는 해외단체여행프로그램 이용객의 70∼80%가 부부동반이라고 밝혔다.
연령별로는 50대 부부가 70%정도로 가장 많고 다음이 40대 부부(20%), 60대 부부(10%)라는 것.
이들은 대체로 동남아지역 단일목적지를 택해 3박4일∼4박5일 여정을 즐기는데, 대만·필리핀·홍콩·일본·하와이 등을 주로 찾고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족동반 여행이 가정의 새로운 풍속도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은 핵가족·소자녀 시대에 따라 형성된 가족중심문화와 궤를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있다.
여기에 경제력의 향상과 무조건적인 절약보다는 합리적 소비를 높이 사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또 여성 특히 주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점등도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 가족」임을 온 몸으로 절감케 하는데는 가족여행을 통한「공통의 추억 만들기」가 단연 최고입니다. 애들은 입시에, 가장은 회사 일로, 주부는 각종 모임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일상을 묶어 줄만한 고리가 또 있을까요?』
김지영씨(34·서울 압구정동)의 말은 현대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곰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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