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이낙연 미는 흑산도 공항, 환경부 돌연 심의 중단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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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공항에 대한 심의 절차가 중단됐다는 소식에 전남 신안군 흑산도 주민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사진은 공항 개항을 촉구하는 흑산도 주민들과 관광객, 흑산도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흑산도공항에 대한 심의 절차가 중단됐다는 소식에 전남 신안군 흑산도 주민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사진은 공항 개항을 촉구하는 흑산도 주민들과 관광객, 흑산도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국립공원인 흑산도에 소규모 공항을 건설하는 사업이 정부 부처 간 갈등 양상으로 번지는 가운데 청와대까지 나섰지만, 해결에는 실패하고 '심의 중단'이란 어정쩡한 방식으로 봉합하는 데 그쳤다.

국토교통부 서울지방항공청이 추진하는 흑산 공항이 국립공원위원회(이하 공원위)라는 벽에 부딪힌 가운데 국토부나 국무총리실에서는 승인을 압박하면서 환경부는 승인도, 취소도 못 하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 것이다.

국립공원 내 공항 건설사업은 공원위에서 승인을 해야 추진이 가능하지만, 현재 공원위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간위원들이 흑산 공항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당장 표결에 들어갈 경우 부결이 될 가능성이 큰 상태다.

흑산도 공항은 1833억원의 국비를 투입해 정원 50석 안팎의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1160m 길이의 활주로와 여객터미널 등을 건설해 관광 활성화와 주민 편의를 도모하려는 사업이다.
하지만 건설대상지가 국립공원인 데다 철새 도래지이고, 경제성도 낮다며 환경단체 등에서는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흑산도공항 위치 [중앙포토]

흑산도공항 위치 [중앙포토]

환경부 돌연 심의 중단 발표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장인 박천규 환경부 차관이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흑산공항 신설 관련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계획 변경안 재심의를 위한 124차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장인 박천규 환경부 차관이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흑산공항 신설 관련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계획 변경안 재심의를 위한 124차 국립공원위원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환경부는 2일 보도자료를 통해 흑산도 공항 건설과 관련한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 계획 변경’에 관한 공원위 심의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사업자인 서울지방항공청에서 서류를 보완해서 다시 제출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이채은 환경부 자연공원과장은 “(공원위가 아닌 환경부 직원으로 구성된) 사무국 차원에서 심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며 “신청서를 보완해서 다시 내겠다는 건 처분을 신청한 사람의 권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원위의 민간위원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한 공원위원은 “지난 7월부터 전문가 검토, 주민 의견 청취 등 심의 절차를 진행해왔는데, 환경부가 공원위를 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심의를 중단을 결정한 것은 월권행위”라고 말했다.

흑산도 공항 사업은 지난 2016년 10월 국토부 서울지방항공청이 공원위에 사업 계획을 제출했으나, 공원위는 그해 11월에 보완 요구를, 지난해 7월 재보완 요구를 했다. 이에 서울지방항공청은 지난 2월 재보완 서류를 제출했고, 공원위는 지난 7월부터 경제성·환경성·안전성 등 쟁점사항에 대한 전문가 검토와 종합토론회 등을 진행했다.

지난달 19일 제124차 공원위에서는 위원들이 진행한 전문가 검토와 토론회 등의 결과를 보고 받고 최종 승인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으나 국토부 등의 반대로 결론을 내지 못하고 회의가 중단됐다.

환경부 공원위 운영에 국토부 불만

국립공원위원회 위원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흑산공항 신설 관련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계획 변경안 재심의를 위한 124차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위원장인 박천규 환경부 차관의 모두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뉴스1]

국립공원위원회 위원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사무소에서 열린 흑산공항 신설 관련 다도해해상국립공원계획 변경안 재심의를 위한 124차 국립공원위원회에서 위원장인 박천규 환경부 차관의 모두발언을 경청하고 있다. [뉴스1]

국토부가 심의 중단을 요구한 것은 우선 공원위에서 표결할 경우 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 위원 당연직 11명과 민간위원 13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민간위원들은 모두 반대를 하고 있다. 정부 측 위원 중 일부도 불참이나 기권하겠다는 입장이다.

국토부는 또 지난달 19일 회의에서 민간위원들이 제출한 보고서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주장한다. 국토부 측은 “전문가도 아닌 공원위원들이 환경성뿐만 아니라 이미 검토가 끝난 경제성·안전성까지 다시 따지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문제가 있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사업 추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국토부는 쟁점 보고서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공원위에 제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민간위원 측은 “지난 7월 회의에서 공원위원들이 쟁점별 전문가 검토 등 심의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는데,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국토부를 비난했다.

한 민간위원은 "국토부가 자료를 보완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계획을 철회한 것"이라며 "처음부터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하고, 공원위 상정 여부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총리실과 환경부 사이에 갈등도

전남 신안군 흑산면 주민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사무소 앞에서 흑산공항 건설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전남 신안군 흑산면 주민들이 지난달 19일 서울 마포구 국립공원관리공단 서울사무소 앞에서 흑산공항 건설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환경부 산하 공원위와 국토부와 갈등을 빚자 청와대가 나섰지만, 근본적인 해결에는 실패했다.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청와대가 소집한 환경부-국토부 양 부처 차관회의에서도 환경부는 국토부가 공항 계획 자체를 철회하고 공항이 아닌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국토부는 철회할 수 없다고 맞섰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나선 것은 흑산 공항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사항이기도 하지만 환경부와 총리실 사이의 갈등도 우려했기 때문이다.
환경운동가 출신인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흑산도 공항 추진에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흑산 공항 건설은 이낙연 국무총리가 전남도지사 시절 역점을 두어 추진했던 사업이다. 이 총리는 전남지사 취임 후 흑산 공항을 ‘전남 미래를 바꿀 사업’ 중 하나로 선정하고 개항 작업을 해왔다. 당시 이 총리는 “흑산 공항이 2020년 완공되면 흑산도와 서울, 중국 간 접근성이 1시간 거리로 개선되는 ‘세기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총리실이나 청와대가 중립적인 입장이 아닌, 공항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환경부와 국토부 갈등을 중재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흑산도 주민들은 패닉 상태

여객선을 이용하는 흑산도 주민들은 풍랑이나 안개주의보 때마다 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며 공항 건설을 원하고 있다. 사진은 흑산도 주민들과 관광객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여객선을 이용하는 흑산도 주민들은 풍랑이나 안개주의보 때마다 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며 공항 건설을 원하고 있다. 사진은 흑산도 주민들과 관광객 모습. 프리랜서 장정필

심의 절차가 중단됐다는 소식에 흑산도 주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공항이 건설될 경우 응급환자 후송이나 부식·생필품 조달 등 생활여건이 크게 나아질 것으로 기대해왔기 때문이다. ‘철새 기착지’나 국립공원 여부를 떠나 최소한의 의료·생활 여건을 위해 공항이 건설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민 고강희(40)씨는 “지난 겨울만 하더라도 사흘 동안 배가 전혀 뜨지 않아 부식은 물론, 아이들 분유까지 떨어져 곤욕을 치렀다”며 “국립공원이라는 이유로 주민들만 피해를 봐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도 가혹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흑산 공항 반대 목소리를 놓고 “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전남 목포항에서 92㎞가량 떨어진 흑산도는 풍랑 및 안개 주의보가 발효되면 발이 묶이기 일쑤여서다. 육지에서 2시간 10분이 걸리는 쾌속선의 경우 작은 기상이변만 있어도 운항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부 주민들은 이날 심의 중단을 계기로 공항 건설촉구를 위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흑산도 본섬 주민 2300여 명 중 700여 명은 흑산 공항 건설을 위한 진정서에 서명하고 공항 조기 건설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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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수 환경전문기자, 최경호·천권필 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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