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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독립운동 하듯 기술 확보하라” 독립투사 김법린에게 원전 개발 맡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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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 설립에 이어 2월 3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 공릉동)의 당시 서울대 공대 4호관에서 문을 연 원자력 연구소 개소식 장면. [중앙포토]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 설립에 이어 2월 3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 공릉동)의 당시 서울대 공대 4호관에서 문을 연 원자력 연구소 개소식 장면. [중앙포토]

1956년 7월 8일 워커 시슬러 박사를 만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원자력 발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원자력 전담기구와 연구소 설립, 유학생 파견이라는 세 가지 방안을 즉각 실행에 옮겼다.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길을 찾았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는 바로 그해 원자력 전문가를 키우기 위한 국비유학생 제도를 만들었다. 그 뒤 여러 해에 걸쳐 모두 237명을 뽑아 미국·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시슬러가 제안한 50명보다 훨씬 많다. 이들은 원자력을 넘어 한국 과학기술 전반의 튼튼한 뼈대를 이뤘다.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 발족을 전하는 대한뉴스 화면.원자력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과학기술 입국의 시작이다. [중앙포토]

1959년 1월21일 원자력원 발족을 전하는 대한뉴스 화면.원자력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과학기술 입국의 시작이다. [중앙포토]

관련 행정 조직으론 이미 56년 3월 9일 문교부에 설치한 원자력과가 있었다. 그해 2월 3일 미국과 맺은 원자력협정이 계기였다. 정부는 이를 전담부서인 원자력원으로 격상하기로 했다. 58년 2월 국회를 통과하고 3월 11일 공포된 원자력법은 전담 기관인 원자력원을 설치하도록 했다. 원자력 정책을 심의·의결하는 원자력위원회,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원자력연구소, 행정업무를 맡는 사무총국을 산하 기관·조직으로 두도록 했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53) #<5>초대 원자력원장 김법린 #불교 대표로 임시정부 설립 참여 #해방 뒤 문교부 장관 역임한 거물 #원자력으로 전력자립 이루라는 의미 #연구소 세우고 유학생 보내며 활기 #이승만 '과학기술로 잘사는 나라' 의지

59년 1월21일 원자력원이 발족하고 2월 3일엔 산하 기관인 원자력연구소(현 원자력연구원)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 공릉동)의 당시 서울대 공대 4호관에 문을 열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설립한 과학기술 연구소다. 이로써 원자력을 위한 행정기구·연구소·유학생의 삼박자가 갖춰졌다. 과학입국을 위한 정부와 지도자의 의지는 확고했고 조직 설치 과정은 신속했으며 업무 진행은 효율적이었다.

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 정부 수립 뒤 3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에 유학한 철학자다. [중앙포토]

김법린 초대 원자력 원장. 정부 수립 뒤 3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항일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프랑스에 유학한 철학자다. [중앙포토]

더욱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원 초대 원장에 철학자인 김법린(1899~1964) 전 교육부 장관을 임명한 것이다. 김 원장은 내가 서울대 행정대학원 학생 시절에 원자력원 수습행정원으로 일하면서 모셨던 바로 그분이다. 가까이에서 보좌하면서 인간적이고 학구적인 자세, 치밀한 업무추진,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에 반해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원자력원장에 그가 임명된 것은 단연 화제였다. 예사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19년 3·1운동에 참가한 것을 비롯해 온몸으로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다. 14세에 불교 승려로 출가했으며 휘문고보와 불교중앙학림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3·1운동의 불씨를 서울에서 현재의 부산·경남 지역으로 옮겨 날랐다. 그는 서울에서 당시 불교계 대표였던 만해 한용운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로 몰래 옮긴 뒤 3월 18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동래읍 장날에 이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 뒤 불교계 항일비밀결사체인 한국민단본부 대표 자격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했다. 20년 국내에서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해 무장투쟁을 준비하다 발각되자 다시 상하이로 몸을 피했다. 21년 프랑스로 떠나 파리대학 문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이듬해 벨기에 브뤼셀의 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학업과 독립운동을 병행했다. 28년 귀국해 투쟁을 계속했는데 38년 옥살이를 하는 등 체포와 투옥을 반복했다. 참으로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가의 이력이 아닐 수 없다.

해방 뒤 민족진영에서 불교계 대표로 활동하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52년 안호상·백낙준 선생에 이어 3대 문교부 장관으로 일했다. 장관 출신의 독립운동 거물이 초대 원장을 맡은 원자력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넘쳤다. 이 대통령이 애국지사를 원자력원장으로 임명한 데는 깊은 뜻이 있었다. 바로 독립운동을 하듯 끈질긴 집념으로 원자력 기술을 확보해 전기 자립과 이루라는 명령이었다. 과학기술로 국민이 편안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김 원장의 취임은 한국 원자력과 과학기술에는 물론 내 인생에도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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