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테러를 테러시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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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먼저,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초기 수사에 따르면 테러범 지충호씨는 범행 전에 이미 오세훈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사무실을 직접 방문해 박근혜 대표의 유세 일정을 확인한 뒤 신촌 현대백화점 앞 유세현장으로 갔다. 그저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문방구에 들러 홧김에 문구용 칼(커터)을 사들고 달려든 게 아니다. 계획된 범행이었다.

또 범인 지씨는 그저 무식하고 아둔한 사람이 아니다. 2005년 8월 출소한 지씨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차례 진정을 낸 단골 진정인으로 인권위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청송 제1보호감호소에 수감돼 있던 2002년 3월부터 올해 4월까지 모두 13차례에 걸쳐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하지만 인권위 조사 결과 지씨가 교도소에서 인격권을 침해당한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지씨는 먼저 교도관을 자극해 놓고 그에 대한 조치가 부당하다고 진정하는 등 법과 제도를 지능적으로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인권위 관계자의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테러범행 뒤 "민주 살리려 그랬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것은 자신의 비호세력을 염두에 둔 나름대로 계산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테러범 지씨는 일자무식쟁이도 아니고 단순 우발적으로 일을 벌일 만큼 아둔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고 계산된 발언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다만 우리는 그런 계산의 뒤가 무엇인지 아직 모를 뿐이다.

통상 테러의 배후는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테러의 상처는 깊게 남는다. 박근혜 대표의 얼굴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 남는다. 테러를 한 번 자행하면 그것을 목격하거나 전해들어 알게 된 모든 사람이 몸서리치며 테러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공개적으로 글을 쓰거나 발언하는 이들도 언제 어떤 식의 테러가 있을지 모른다는 내면의 공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 테러가 노리는 바일지 모른다. 그래서 위축돼 움츠러드는 것에 테러는 어둡게 미소짓는다. 따라서 우리는 테러의 그 어두운 미소를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 오히려 그 어두운 미소의 테러를 테러시켜야 한다. 칼.총.폭탄이 아니라 우리의 결코 굴하지 않는 밝은 웃음과 그래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으로 말이다.

이번 테러로 5.31선거는 엉망진창이 됐다. 아니 그동안 진창에서 뒤엉켜 있던 정치의 결정판이 이번 테러다. 테러는 정치의 부재, 정치의 자멸을 의미한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정치는 증오와 무시, 그리고 폄훼의 대명사였다. 그런 정치를 보며 국민은 최선은커녕 차선(次善)의 선택도 기대하지 못한 채 차악(次惡)의 선택이라도 해 보려던 차에 최악의 테러가 터진 셈이다. 테러는 상대의 전면적 부정이다. 상대의 부정을 통해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회에서 테러의 암수는 자라난다.

결국 박근혜 대표에 대한 테러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요, 꼬일 대로 꼬인 사회적 심성의 비틀린 표출이며 갈 데까지 간 정치의 현주소다. 이제 정치인뿐 아니라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통렬하게 반성하고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와 소통, 그리고 아름다운 경쟁이 다시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지 발본적으로 생각할 때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