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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편집국장레터]네 눈의 티, 내 눈의 들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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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호 면

1994년 여름이었을 겁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김대중(DJ) 아태평화재단이사장의 동경납치 생환 기념행사가 있다고 해 취재를 갔었습니다. 그 때 서울대총학생회장 출신으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는 MBC 기자를 만났습니다. 스포츠 기자로 일하던 당시 큰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이겨냈다는 사회자 설명에 새삼 얼굴을 돌아본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듬 해 그는 김영삼(YS) 당시 대통령의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안양에서 출마했고, 국회부의장을 거쳐 지금은 5선의 중진 정치인이 돼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 얘기입니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27일 의원실 압수수색에 항의해 국회의장을 항의방문했다. 오종택 기자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27일 의원실 압수수색에 항의해 국회의장을 항의방문했다. 오종택 기자

 VIP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박승희입니다. 심 의원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심 의원의 보좌진이 확보한 예산 관련 자료를 둘러싼 논란입니다. 이 논란을 보며 문득 20여년 전 기억을 떠올린 건 그 때 “불굴의 의지”라고 표현됐던 심 의원의 집요함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점입니다.

 무성한 정치 공세를 걷어내고 이 논란의 시작으로 돌아가면 정부의 보안의식 부재가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줍니다. 전후사정을 안다는 몇몇 국회 보좌관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경력이 풍부하진 않지만 너무나 열심이고 집요한’ 심 의원의 보좌관이 기획재정부가 준 디브레인 접속권한으로 전산망 속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청와대 씀씀이가 정리된 자료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정부 예산을 감시해야하는 만큼 국회의원과 보좌진에게 접근이 허용되는 디브레인은 기획재정부 산하 한국재정정보원이 운영하는 디지털예산회계시스템입니다. 기재부 주장은 합법적으로 허용된 디브레인만 들어가야 하는데 심 의원실에서 그걸 넘어 재정분석시스템이라는 하이매뉴얼에 불법적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심 의원실을 고발하면서 정보통신망법 및 전자정부법 위반혐의를 적용한 게 그 이유입니다. 민주당도 “5~6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국가 기밀과 같은 해당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며 해킹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반면 심 의원은 녹취록까지 공개하며 “(보좌진이 디브레인)이곳저곳을 검색하던 중 컴퓨터 자판기의 백스페이스를 두세 번 쳤더니 문제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엇갈리는 주장들이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의원실 보좌관이 마음대로 뚫고 들어갈 정도의 허술한 보안망에 ‘국가기밀’이라는 자료가 모아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게 해킹이라 해서 심각성이 덜한 건 아닙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공인된 정보기관이든 공인되지않은 사설기관이든 국가기밀,산업기밀을 빼내기 위해 혈안이 돼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료 입수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정치 공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보안망이 뚫렸다는 본질을 가릴 순 없습니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이 정부의 비공개 예산 정보 무단 열람·유출 의혹 혐의로 국회 의원회관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실을 압수수색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이 정부의 비공개 예산 정보 무단 열람·유출 의혹 혐의로 국회 의원회관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실을 압수수색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3년 8월 한국재정정보원 설립에 관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될 당시 기재부는 국회의원들에게 “현재 민간위탁업체를 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재정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정부 출연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민주평화당 유성엽 의원에 따르면 당시 의원들이 기재부 몸집 부풀리기라는 지적과 함께 ‘현재 민간에 위탁 중인데 아직 사고가 난 적도 없지 않느냐’고 따지자 기재부 측은 “이 부분은 절대 사고가 나면 안 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한국재정정보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라면 ‘절대 사고가 나면 안되는 부분’에서 사고가 난 겁니다. 그런 만큼 정부는 자료를 빼낸 야당의원의 불법만 주장할 게 아닙니다. 국가기밀이 이렇게 쉽게 유출되는 상황에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사과부터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지도 설명해야 합니다.

 최근들어 공공부문에선 각종 보안 사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정부의 신규 공공택지 후보지가 유출된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 논란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관련 부처나 검찰의 대응을 보면 심재철 의원 건과 사뭇 다른 속도와 시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국회 상임위 사ㆍ보임 조치가 이뤄지긴 했지만 과천시장이 유출했는지, 경기도 공무원이 유출했는지, 국토부 관계자가 유출했는지 주장이 제각각입니다. 사실관계는 여전히 가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서슬퍼런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고 있는 중이라서 허투로 넘길 일이 아닙니다. 유출된 정보가 부동산 투기세력과 연결됐다고 가정할 경우 그 행위가 불러올 파장은 오히려 심재철 의원 건보다 더 심각합니다.

27일 새벽 가상화폐 거래소인 코인체크의 경영진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580억엔(약 5648억원) 규모의 가상화폐 해킹 사고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27일 새벽 가상화폐 거래소인 코인체크의 경영진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하고 있다. 이들은 이날 580억엔(약 5648억원) 규모의 가상화폐 해킹 사고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국가를 경영한다는 건 정부가 얼마나 이타적(利他的)인지를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그 결과를 평가받는 행위입니다. 다른 정부와 다르게 출발했던 이 정부입니다. 팔이 내 쪽으로만 굽고, 멀리 있는 사람보다 바로 옆의 내 사람만 쓰고, 안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던 과거 정부의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그건 또 하나의 적폐를 쌓는 겁니다.

 중앙SUNDAY는 추석 연휴 전 탐사보도팀이 취재한 ‘내비게이션으로 풀어본 한국인의 추석 빅데이터’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교수가 5년 걸려 완성한 전국비만지도를 입수해 보도한 ‘도시보다 더 뚱뚱한 농촌’이라는 비만 특집기사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중앙SUNDAY는 이번 주 스페셜리포트로 ‘세계 자동차시장의 미래 전기차 VS 수소차’를 다뤘습니다. 맛집을 찾아 유랑하는 ‘한국인 빅데이터 분석기사 2탄’도 준비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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