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시대 악연과의 단절-일본 히로히토시대 폐막에 접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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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히로히토」일황의 죽음은 우리 겨레 모두에게 치욕의 시대를 다시 일깨워줬다. 그가 일본인들에게 「천황」으로 군림했던 62년동안 우리에게 있어서는 굴욕과 그 굴욕을 극복하는 시대였다.
그가 즉위한 26년부터 패전한 45년까지의 기간은 근대화로의 꽃봉오리를 막 피우려던 한국을 무자비하게 꺾어 버리고 우리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살해 한민족을 그들에게 동화시키려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와 같은 제국주의적 기치 아래일본은 한국인 전체를 태평양전쟁에 동원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동포들이 의미없는 죽음과 고통을 당해야 했다. 「히로히토」는 이 엄청난 한민족에 대한 죄과에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할 최상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84년 『양국간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말로 대한 침략을 사과했지만 36년 간의 침략을 받은 우리, 그리고 그 고통이 유형무형으로 아직껏 남아있는 우리로서는 그것은 충분한 사죄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 소식에 접하면서 우리가 한 자연인의 죽음에 표명해야 마땅한 애도의 뜻에 인색한 것은 바로 그가 상징하고 있는 역사적 죄과에 대한 그런 미진함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한 다음 우리는 미래 지향적 관용이 한일관계의 과거를 실질적으로 청산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의 일방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가 이룩한 경제성장은 일본 경제와의 연계성안에서 실현된 것이다.
이 연계성은 서구와 미주가 배타적 경제 블록 형성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이 시대에 더욱 중요성이 커가고 있다. 국제정치면에서도 한반도 주변에서는 이제 동서진영간의 양분법적 세력 구조가 이념의 벽을 무너뜨리고 다원구조로 조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와같은 상황은 동아시아 지역국가들에도 구원에 집착하기보다는 상호간의 이익을 위해 결속해야할 외적 압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은 상황 변화는 미진한 상태로 남아있는 한일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원활히 대처해 나가야 할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히로히토」의 죽음에 진심의 애도를 표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도 90연대이후의 새 시대를 열 「아키히토」새 일황의 계승을 환영하는 바다.
불행했던 과거의 청산이 구시대의 상징적 인물의 사거를 기다려서야 가능하다는 것은 일본 「천황제」의 특수성 때문에 불가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적 계기의 깊은 뜻을 일본 지도층은 엄숙한 자세로 음미하기를 바라며, 그런 새마음가짐이 앞으로 전개될 한일관계의 초석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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