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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에 의한, 하루키를 위한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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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호 31면

책 읽는 마을 ⑪ 북카페 ‘피터캣’

피터 캣의 하루키 독서 모임. 왼쪽부터 차윤주, 김병한, 김남희, 김아름, 고중용, 주인 이한구씨. [장진영 기자]

피터 캣의 하루키 독서 모임. 왼쪽부터 차윤주, 김병한, 김남희, 김아름, 고중용, 주인 이한구씨. [장진영 기자]

서울 지하철 신촌역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 북카페 ‘피터 캣’은 한국인 하루키스트들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혈 독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하루키 소설을 읽고 모여 ‘팬심’을 확인하고 책 얘기를 나눈다. 다른 소설은 읽지 않는다. 오직 하루키만 읽는 모임이다. 카페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하루키가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전 7년 간 운영했던 도쿄의 재즈 바가 바로 ‘피터 캣’이었다.

매달 한 차례 하루키 얘기판 벌여 #나이·성별·지위 넘어 민주적 토론

9월의 첫 번째 토요일이었던 지난 1일. 하루키 모임 일이다. 아담한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콧수염이 예술적인 주인장 이한구(47)씨가 반긴다. 평범한 직장인이던 그는 2014년 실존적인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화려하지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먹고 살 수는 있지 않을까. 당시 지하철 출퇴근 길에 열심히 읽던 하루키 소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하루키도 비슷한 고민 끝에 술집 주인을 거쳐 소설가가 되지 않았나. 피터 캣이 생기게 된 사연이다.

다시 카페 안. 10여 명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피터 캣의 하루키 읽기 모임은 지난해 3월 시작됐다. 지금까지 펴낸 장편소설 14권을 모두 읽어, 한 바퀴 돈 다음 2기 읽기 모임에 돌입했다. 2기 세 번째 모임. 하루키의 1982년 장편 『양을 쫓는 모험』(1995년 국내 출간)이 이날 토론할 책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왜 하루키 소설인가. 뜻밖의 답을 들었다.

“한국 작가들의 소설에서 내가 싫어하는 모든 포인트들이 배제돼 있다.”

아버지가 폭력적이고 우리 삶은 너무 힘들고, 이런 신파조가 없고, 뭘 가르치려는 게 없다고 했다. “힘든 삶,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이 요즘 20대에게도 여전히 필요할까요.”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키를 처음 접한 후 10년 넘게 빼놓지 않고 읽어 왔다는 윤하늘(28)씨의 말이다.

피터 캣 사람들의 하루키 사랑은 색깔과 온도가 제각각이었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하루키가 좋다고 했고, 같은 소설을 다르게 읽은 독후감을 교환할 때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초심자도 있었고, 그야말로 전문가도 있었다. 그 모든 다채로움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장 이한구씨가 등 떠미는 열혈 회원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연세대 수학과 김병한 교수. 미국 MIT 교수로 있다가 모교로 돌아왔다. 1년 전 가입할 때는 뭔가 도움을 줄 수 있겠거니 여겼는데, 문학에 관한 한 고수가 많아 자기가 제일 받는 게 많다고 했다. 하루키 모임뿐 아니라 주제를 달리해 매주 열리는 피터 캣의 다른 독서모임에도 나간다. 실은 하루키 모임을 제보했다.

차윤주. 서울 자하문로에서 사진책방 을 운영한다. 90년대 초부터 읽기 시작. 내공 최상급. 하루키를 “다정한 개인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김아름. 84년생. 현재 모임 회장. 기업교육 컨설팅 회사를 다닌다. 제일 좋아하는 하루키 소설은 『해변의 카프카』. 매번 다르게 읽혀서다.

고중용. 90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피터 캣의 인문교양 모임에서 니체를 읽다 하루키 모임에까지 나오게 됐다.

김남희. 84년생. 카드 회사에 다니는데, 글 쓰는 게 꿈이다. 한국문학, 세계문학, 인문학 모임에도 나간다.

이래진. 94년생 대학생. 의상을 전공한다. 나이는 가장 어린 축이지만 하루키 논전에서 밀리는 적이 별로 없다. 이한구 사장의 수석보좌관 노릇을 자임하며 모임에 열심이다. 기형도·황지우 시집을 사장에게 추천해 곧 피터 캣에서 시 읽기 모임이 열린다.

김병한 교수가 말했다. “여기서는 나이, 성별, 직업, 사회적 지위, 그런 거 다 잊고 지내요. 가장 민주적인 독서 공간이에요.”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책 읽는 마을’은 제보를 받습니다. 본지 지식팀(02-751-5389) 또는 2018 책의 해 e메일(bookyear2018@gmail.com)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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