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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핸 고향평양 가봤으면…|새해 새벽을 여는 실향상인 김원일씨 부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기사년 새해를 가장 먼저 여는 실향민 김원일 (65·서울 응암동98)·김춘실(62)씨 부부.
동이 트려면 아직 이른 새벽4시, 남대문시장의 새벽장을 준비하는 「피양아저씨」부부에겐 기사년 새아침이 어느 때보다 새롭게 느껴진다.
35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잠을 설치며 남대문시장에서 고생한 덕분에 허리펴고 살수있는 「보통사람」이 된데다 지난해부터 무르익은 사회각층의 통일논의와 최근 들어 중국·소련및 동구권과도 눈부신 관계개선을 거듭, 생전에 고향을 찾아볼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기 때문이다.
김씨부부가 부모·형제와생이별하고 고향인 평남 대동군 고평면 시산리마을을 떠나온 것은 전쟁이 한창인 50년 12월.
『6·25직전 공산당이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군입대시키더군요.』 김씨는 징병을 피해 마을 뒷산에 땅굴을 파고 넉달동안 숨어 있다가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부인과 세살난 딸을 데리고 내려온 것이 평생 실향민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
김씨가 서울에 도착한지 이틀만에 국군에 자원입대, 전·후방을 오갈때 부인은 딸을 업고 대구 칠성시장에서 미군용 통조림을 팔며 험난한 「삼팔 따라지 인생」을 시작했다.
『지긋지긋했던 북에서의 생활을 생각하면 당시 춥고 배는 고팠으나 오히려 행복했었지요.』
부인 김씨는 남편이 전상을 입고 53년 의병제대하자 함께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시장에서 군복장사에 나섰다.
당시 남대문시장터는 지금과는 달리 회현동 산동네에 판자움막을 지어 살며 가게라야 손바닥만한 좌판이 전부.
그나마 1년도 못돼 시장에 불이 나 1년동안 서울시내를 누비며 행상을 하는 뼈를 깎는 고생 끝에 지금의 대도상가 자리에 정착했다.
매일 새벽 제일 먼저 시장에 나가 가게문을 열고 통금 직전에야 겨우 허리를 펴고 귀가하는 생활이 어느덧 30여년.
가게는 군복에서 교복마춤집으로, 80년 교복자율화조치 이후에는 지금의 청바지 도·소매상으로 바꿔었다.
2평 남짓한 지금의 점포는 평당 1억여원을 호가하며 하루 순수익만도 10여만원 안팎.
아들도 셋씩이나 둬 남부럽지 않게 대학까지 모두 마치고 80년초에는 서울 응암동에 대지 57평짜리 단독주택도 마련했다.
큰딸 명화씨 (42)·둘째아들 영남씨 (32)·막내 영덕씨 (29)는 10여년전 미국 뉴저지주로 이민가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으며 큰아들 영철씨(35·회사원)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김씨는 그동안 뒤따라 월남한 고향사람을 통해 아버지가 6·25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
『지나온 38년이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아요. 멀잖아 그리던 고향땅을 밟아볼수 있을것 같고….』
반백에 이마의 주름이 팰대로 팬 노부부는 고향마을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듯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사회도 우리부부만큼 온갖 풍파를 겪었으니 이젠 잘 사는 세상이 돼야한다』는 실향민 김씨 부부.
『지난해 학생들이 몰려들어 구호를 외쳐대고 최루탄이 뒤이을 때엔 고향가는 꿈이 이대로 무산되는게 아닌가하고 정말 가슴답답했다』는 김씨부부는 『폭력을 앞세워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사회풍조가 새해엔 모두 사라지길 고대한다』고 했다.<최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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