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대제 - 김문수 후보 포토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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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대제 후보는
가난 탓에 대학 못 갈 뻔
공부로 '인생 역전' 일궈

열린우리당 경기지사 후보 진대제(54). 그의 삶을 요약하면 '아주 가난하게 자랐지만 공부를 특출나게 잘해 성공한 인생'이다. 그래서 강한 승부욕, 성공에 대한 집념, 성실함, 검소함이라는 자수성가형 특성이 엿보인다.

◆ 가난=마흔셋 때 그를 낳은 어머니는 젖을 주지 못했다. 어머니의 삯바느질이 생계 수단이어서, 변변히 먹을 것도 없는 집이었다. 그는 "너무 못 먹어서 자라지 못 했다"고 말한다. 그의 키는 162㎝다. 고교 때는 판잣집과 단칸방을 전전했다. 초등학교 때는 참고서 한번 가져보는 것이, 고교 때는 10원짜리 크림빵 사먹는 게 소원이었다.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못 할 뻔했다. 경북중 3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공고에 가 하루빨리 혼자 밥 벌어 먹고 살라"고 했다. 진 후보는 "그것이 내 운명이려니 했고, 그렇게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구 누나'라고 부르는 이웃이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고 경제적 도움을 줘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 우등생=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경북중에서는 늘 전교 10등 안에 들었다. 쟁쟁한 학생들이 모인 경기고를 6등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앉은뱅이 책상에서 공부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누워 자고, 다시 일어나 공부하는 '오뚝이 공부법'이 비결이었다.

그는 지금도 집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쓴다. 공부는 그에게 생명줄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입주 과외교사를 하고 입시학원의 실력고사 상금을 타 생활비에 보탰다.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 과정 때는 국비 장학금과 학교 장학금을 이중으로 받아 두 자녀(현재는 셋)를 키우며 공부했다.

◆ 승부욕=진 후보는 요즘 유세 때 "지금까지 하고자 한 것은 다 이뤘다"고 외친다. 그의 책 '열정을 경영하라'에는 '가난의 불편함을 절대로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지 열심히 하고 또 남한테 져서는 안 된다는 집념이 생겼다'는 대목이 있다.

삼성전자에서 받은 월급.보너스.스톡옵션으로 만들었다는 그의 재산은 시가로 따지면 200억원 이상이다. 집이 다섯 채나 된다. 대학원 때 과외로 번 돈을 모아 집을 샀을 정도로 집에 애착이 강하다. 그의 부인 김혜경씨는 "자기 옷 한벌 사는 것도 망설이는 지독한 짠돌이"라고 남편에 대해 말했다.

이상언 기자

김문수 후보는
3선 개헌 반대하다 정학
눈물 많은 '노동운동가'

한나라당 김문수(55) 경기도지사 후보는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 주변에선 정보다 눈물이 많다고 한다.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농성 현장에선 노동자들을 보며 운다. 심지어 드라마를 보다가도 눈이 빨개진다. 부인 설난영(53)씨는 "'어휴, 뭘 그렇게 우느냐'고 달래며 휴지를 꺼내준다"고 한다.

◆ 가난한 유교 집안=김 후보는 1951년 경북 영천의 '경주 김씨 양반 씨족부락'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얼마 안 남은 재산을 문중의 일에 쏟았다. 빚보증 문제까지 겹쳐 김 후보 집은 점점 초라해졌다. 김 후보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가장 싫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경북중.고교에 다닐 때 우등생이었다. 동창들은 "친구들을 불러놓고 '너 인생관이 뭐냐' '이 다음에 뭐 할 거냐'고 진지하게 말하며 수첩에 적곤 하는 독특한 면이 있었다"고 떠올린다.

그러나 김 후보는 고3 때 3선 개헌을 반대하다 무기정학을 당하며 모범생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그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것도 이즈음부터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같은 소리를 자주 한다. 꿈속에서다.

부인 설씨는 "이 사람이 잠꼬대를 잘하는데 또렷한 목소리로 웅변하는 것처럼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이 상당히 잦다"고 폭로(◆ )한다. 그래서 깨어나면 "처자식은 어떻게 할 거냐"는 핀잔을 듣는다.

◆ 오랜 노동운동 거쳐 정계로=서울대 상대에 진학한 김 후보는 결국 경영자가 아닌 노동자의 길로 들어섰다. 71년 드레스 미싱공장을 시작으로 재단 보조.보일러공을 두루 거쳤다. 한때 장티푸스에 걸려 공장일을 그만둔 뒤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봉건적인 동네에서 내 나이로는 말발이 안 먹혀" 포기했다. 다시 뛰어든 노동운동. 그러나 80년대 신군부는 그에게 가혹했다. 보안사 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고 두 번 투옥됐다. 도피생활이 그에게 준 유일한 '선물'은 부인 설씨다. 두 사람은 노동운동을 하다 알게 됐고 마음이 끌린 김 후보가 프러포즈했으나 거절당했다. 하지만 공안당국에 쫓기던 김 후보가 도피처로 설씨의 집을 택하면서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두 사람은 탁아사업 등 사회활동을 함께하는 동지가 됐다.

김 후보는 94년 민자당에 입당했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여러 가지 개혁에 공감했다"고 말한다. 그 해 8월엔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됐던 서울대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96년 총선에서 경기 부천 소사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내리 3선을 했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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