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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은화의 생활건축

마을 상실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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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

서울 성북구 정릉3동 정든마을의 길은 유독 곧다. 강북에서 보기 드물게 격자형 가로망을 갖췄다. 정든마을이라는 새 이름을 갖기 전에 오랫동안 ‘정릉동 부흥 주택 단지’라고 불렸다.

부흥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듯, 정든마을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을 복구하면서 만든 마을이다. 부서진 집들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서울로 몰렸다. 먹는 문제보다 사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가 나서서 공공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재건·부흥·희망 주택 등 집의 이름이 다양한데 당시 국가 재건의 열망을 그대로 담았다. 집은 해외 원조나 한국산업은행의 주택자금융자를 바탕으로 지었고, 민간에 분양하거나 임대했다.

정릉동 부흥주택은 1957년에 지어졌다. ‘2호 공동주택’으로 불렸는데, 오늘날 ‘땅콩주택’처럼 2층짜리 집 두 채가 한 집처럼 붙어 있다. 시멘트 블록을 쌓은 뒤 나무 지붕을 얹어 완성했다. 작지만(연면적 45㎡), 당시에는 신식 주택이었다.

정든마을 부흥주택

정든마을 부흥주택

반세기쯤 지나자 다시 낙후된 동네에는 뉴타운 바람이 불었다. 싹 밀고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했다. 하지만 2013년 서울시는 마을을 재생하기로 했다. ‘마을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공공에서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개인이 주택을 리모델링하여 주거환경을 보전·정비·개량하는’ 사업이 추진됐다. 마을 길은 포장됐고, 벽화도 그려졌다.

그런데 근대 주거 양식이자, 마을의 역사성을 대표하던 부흥주택이 헐리고 있다. 60여 채에서 현재 20여 채가량 남았다(사진). 옛집 두어 채를 합친 자리에 5층짜리 다가구 건물이 빠르게 지어지고 있다. 대다수가 임대용 원룸 건물이다. 지자체에서 집의 수선비를 저금리로 빌려준다고 했지만 연로한 집주인들에게 낡은 집은 버거운 존재다. 고칠 여력이 없어 집장사들한테 팔고 떠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마을 재생의 핵심은 커뮤니티 부활에 있지만 원주민은 떠나고, 1층에 주차장을 둔 신축 빌라의 문은 언제나 잠겨 있다.

정든마을의 미래는 가서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5층짜리 빌라 옆 부흥주택은 위태로워 보인다. 정든마을뿐 아니다. 뉴타운 해제 이후 난개발로 몸살 앓고 있는 도시 마을들이 숱하다. 낭만만으로 옛 마을을 재생시킬 수 없다. 어설픈 재생의 현장에서 또 다른 상실의 시대가 열릴 뿐이다.

한은화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