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넘기는 「광주」 진상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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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2일 새벽까지 22명의 증인을 신문하고 금년 청문회 활동을 마감한 국회광주특위는 그 동안 광주민주화운동의 발발동기부분과 맞물려 있는 △12·12사태와 5·17조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광주초기진압상황 △발포명령 △지휘체계 △사망자수 등의 쟁점 사항을 다시 부각시키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에 있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몇 가지 쟁점에서는 관계자들이 양극적인 입장을 보여 커다란 시각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청문회 시작 때부터 야당측은 광주민주화운동이 기본적으로 12·12 이후 일관된 시나리오에 의해 움직여진 소수정치군인의 집권욕에 의한 쿠데타과정의 희생물로 보았다. 따라서 △12·12사태의 불법성 △5·17조치의 부당성과 위법성 △김대중사건의 조작 △광주진압의 무자비한 강경 잔악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발포명령이 전두환· 정호용씨 등 신 군부의 실세에 의한 것이었음을 입증시키는데 주력했다.
반면 여당측은 상황논리 등을 들어 광주사태를 양 시론 입장에서 접근하고 동시에 지휘체계의 강화를 부인하고 발포명령이 하부에서 이뤄졌음을 주장하면서 특히 당시 현지 지휘관인 정웅 당시 31사단장의 초기과정의 무능에 돌리는데 주력했다.
광주사태 발생 동기와 관계된 부분에서 l2·12사태의 성격규정은 좀 모호했지만 5·17조치는 부당성등 신 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실체를 드러낸 것으로 요약된다. 노태우 현 대통령까지 연루된 12·12사태에 대해서는 신현확씨는 「하극상」, 주영복· 이희성 씨 등은 『절차상 잘못된 것』이라며 절차상의 문제라고 주장했으나 정승화씨는 아예 『불법 군사변란이며 이는 사형 죄에 해당된다』고 증언했고 야당측은 대개 「반란」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나 5·17조치는 「의도된」것임이 뚜렷해진다.
전군지휘관회의의 백지서명 회의록 파손, 국보위 설치와 국회해산 사전 논의, 정치인 사전연행 등 신 군부의 정권장악 구상을 입증하는 정황증거들이 다수 드러났으며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있던 전두환씨는 중정부장서리까지 자청, 각료간담회에 참석하는 등 이미 실세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음도 확인됐다.
초기 진압과정에서 당시 현지 지휘관인 최웅·권승만 씨는 아예 과잉 진압조차도 부인해 광주사태에 대한 군부 쪽 생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측도 「과잉진압」을 시인하고 사과한 만큼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한 실상규명이 과제로 남은 셈이 됐다.
여야간(또는 여야측 증인간)의 끝없는 논쟁 속에 미로를 헤매던 발포명령 문제도 상당한 윤곽이 드러났다. 최웅 씨는 5월21일 오후1시30분쯤의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자위권이 부여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시민측이 먼저 발포해 61대대장 안부응 중령의 단독결심으로 지대장에 의해 이뤄졌다고 증언했고 이희성 씨는 이날 저녁에야 자위권보유천명을 방송으로 하고 다음날(22일)에 문서로 지시했다고 밝혀 자위권천명 이전의, 사전발포가 명백해졌다.
문제는 61대대의 첫 발포가 과연 대대장 선에서 이뤄졌느냐는 점과 「시민군이 먼저냐 군이 먼저냐」는 선 행위자의 규명과 자위권의 정당성여부, 그리고 이 집단발포 외에 19, 20일에 있은 계엄군의 산발적인 발포 역시 자위권에 의한 것이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 최웅 씨는 『5월21일 계엄군의 발포는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기 때문에 자위권행사의 차원에서 응사 한 것』이라고 증언했고, 권승만 씨도 공수부대가 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먼저 발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정웅 씨는 『첫 집단 발포(21일 오후1시30분) 이전에 시민군은 흉기를 휴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위권행사도 최소한 여단장 이상의 지휘관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대대장 단독 결심」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안부응 씨의 증언 등을 통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하게됐다.
지휘체계의 일원화문제는 아직도 첨예한 대립상태에 놓여있다. 야당측은 정호용씨의 지휘권 행사와 전두환씨의 막후개입에 초점을 맞췄으나 정씨나 군 관계 증인들은 이를 부인했다.
따라서 소준열 씨의 『정호용씨가 조언했다』는 증언과 관련, 정씨 「개입의 정도」가 문제로 남았으며 이와 동시 당시 보안사소속 최예섭 장군의 광주방문확인으로 드려난 보안사 및 전두환씨의 역할 등은 아직도 미진한 문제로 남아있다.
5·17조치와 관련해 최규하 전 대통령의 조기귀국이후 하야에 이르는 과정이 드러나야 할 것이고 이와 함께 5·17 계엄확대, 국보위의 발생과 함께 광주사태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전두환씨의 증언이 광주문제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다.
그밖에 군끼리의 오인사격과 송암동·지원동의 이른바 「양민 학살 사건」 및 정확한 사망자 수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현장검증활동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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