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공들인 해상낙원 '매미'에 갈갈이 찢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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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잘 돌아가신 것 같아요. 남편이 지금 이 모습을 봤더라면 얼마나 가슴 아팠겠어요."

이번 태풍으로 거의 폐허가 된 경남 거제시 일운면 외도(外島) 해상농원 소유주 최호숙(67.여)씨.

崔씨는 "우리 부부가 30여년을 바쳐 만들어 놓은 농원인데 기가 막힌다"며 말끝을 흐렸다.

태풍 '매미'는 이들 부부(남편은 지난 3월 작고)가 피땀으로 일궈놓은 '낙원의 섬'을 철저히 짓밟았다.

"태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아요. 우리 부부는 태풍만 오면 꽃과 나무들이 다칠까봐 마음을 졸였거든요. 태풍이 오는 날에는 차마 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어요." 崔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태풍 피해를 보았지만 이번이 제일 컸다"고 했다.

외도는 자연에 인공을 가미한 섬이다. 거제도 구조라에서 배로 10분(약 4㎞)이면 닿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인기 TV드라마 '겨울 연가'의 마지막 회가 이곳에서 촬영됐을 정도로 파란 바다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번 태풍으로 외도는 말 그대로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높이 50여m의 동섬(본섬에 딸린 작은 섬)에는 섬 꼭대기 나무와 바위, 흙이 무더기로 떨어져 나갔다. 파도가 워낙 높아 동섬까지 타고 넘은 것이다. 높이 15m 가량의 거대한 '남근 바위'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번 태풍에 해송.동백.후박나무 등 50년 이상 된 나무 1백여그루가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혀 나갔다.

1백50여 종류의 꽃 5만여그루는 몽땅 사라졌다. 사시사철 노랑.분홍 등 형형색색의 꽃을 피웠던 꽃밭은 온데 간데 없고 맨 땅만 드러내고 있었다. 1백년 만에 핀다는 용설란도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혀 말라가고 있었다.

소나무.대나무.참나무 등 가까스로 서있는 나무도 멀쩡한 게 거의 없다. 잎들이 염분 피해로 대부분 바짝 말랐고 볼썽사나운 잎사귀만 땅에 뒹굴어 을씨년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태풍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이 섬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색으로 뒤덮였을 것이라고 농원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온갖 나무들이 오염 한점 없는 땅에서 천연 해풍을 맞으며 잘 자라 싱싱함을 한창 뽐낼 시기라는 얘기다.

농원 관리를 맡고 있는 문봉남씨는 "1년생 꽃은 다시 심어 가꾼다지만 원시의 모습을 간직했던 바위와 오래된 나무들이 입은 상처는 언제 나을지 모르겠다"며 "이번 피해를 돈으로는 계산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崔씨와 농원 직원 50여명은 태풍이 지나간 뒤 나무에 물을 뿌려 염분을 빼내거나 부러진 나무.꽃 등을 치우는 복구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1개월은 더 지나야 기초적인 복구가 끝날 것 같다고 했다. 그때까지 관광객도 받지 않을 계획이다.

崔씨 부부는 1970년 이 곳에 피서 왔다가 아름드리 동백나무를 땔감으로 베어버리는 것을 보고 이 섬과 인연을 맺게 됐다.

남편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사업을 정리했다. 그 돈으로 11가구 주민이 살던 4만5천여평의 섬을 사들였다. 2만7천여평에 워싱턴야자.편백나무.용설란.카시아.디지탈리스 등 1천여 종류의 국내외 식물을 심고 가꿨다. 나머지 지역은 천연의 섬 그대로 보존했다. 20여년 만인 95년 4월 드디어 외도해상농원이 탄생했다.

이 섬은 매년 1백만명 가량의 관광객이 찾아와 기암절벽과 천연림.꽃 등을 즐기고 돌아가는 남해안 최대의 천연 관광명소가 됐다. '낙원의 섬'이라는 별칭도 그래서 붙여졌다.

거제 외도=정용백 기자 ,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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