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 언론인 원래 위치 복귀돼야"|국회 「언론 청문회」지상중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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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3일 속개된 국회 문공위언론 청문회는 언론인 강제 해직사태에 초점을 맞췄다. 이날 청문회는 해직기자·당시언론사실무자의 증언을 들은 뒤 언론사 발행인들의 증언을 듣는 순서로 진행됐는데 언론사발행인에 대한 신문은 정부임명발행인과 4대 언론사 사주에 대한 신문으로 나뉘어 진행.
이날도 증인으로 불려나온 이진희·이원홍 씨는 전날의 문공 장관 자격이 아니라 MBC, KBS의 사장으로 나왔는데 두 이씨에 대해서는 12일 비디오파동으로 민정당 의원들이 질문을 하지 못해 이 부분에 대한 할당시간까지 민정당이 차지, 1백 분의 질문시간을 확보.
이 때문에 총 질문시간만도 무려 6백5분이 책정돼 있어 점심·저녁 식사시간을 합치면 이날 청문회도 자정을 넘길 전망.

<이경일·김동수·김근·노성대 씨 증언>
◇신종수 의원(공화) 신문
-80년6월9일 증인은 경향신문사에서 합수부에 의해 대공분실로 연행됐는데 어떤 사람과 함께 무슨 이유로 연행됐는가.
▲이경일 씨=당시 해직 자는 조사국장·외신부장인 나, 외신·경제·편집·사회부 기자 등 7명이다. 표면상 이유는 뒤에 들어 알았지만 사회혼란에 일조하고 용공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행될 때는 왜 연행됐는지 몰랐다. 5월22일부터 광주사태를 보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작거부를 했는데 그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 생각했다.
-증인은 2주일간 남영동에서 수사 받고 고려 연방제를 지지했다는 외견상 발표가 있었는데 군법회의에서는 어떻게 발표됐나.
▲이경일 씨=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제작문제로 걸 수 있다면 걸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터무니없는 용공조작으로 기소했다. 반공법부분은 용공조작이어서 무죄를 받았다.
-80년 당시 기협 편집실장으로 5월17일을 계기로 일제히 계엄사의 검열을 거부키로 결의했나.
▲김동수 씨=그렇다.
-어떻게 연행됐느냐.
▲김동수 씨=5월17일 밤 재야 인사들과 함께 연행될 때 합수부 요원 4명으로부터 집에서 연행됐는데 끌려간 곳은 합수부가 아니고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계속 나에게 『네가 김대중씨의 언론계 총 두목인데 김대중씨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느냐』고 추궁했으나 나는『지금껏 김대중씨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받았겠느냐』고 버티어 이부분만은 허위자백을 하지 않았다.
-80년 신 군부가 언론공작의 대상으로 경향신문을 선정한 이유는.
▲이씨=당시 경향신문뿐 아니라 중앙·한국일보, 합동통신 등 도하신문 통신과 KBS, CBS, TBC기자들도 같은 시기에 제작거부를 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제작거부 열도가 특히 높았고 MBC와 같은 회사로 돼있던 만큼 경향·MBC를 함께 공략, 손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 같다. 따라서 경향신문기자들은 그들 의도에 따른 속죄양이라 생각한다.
◇이철 의원(무) 신문
-MBC제작거부 운동 당시의 사내 상황은.
▲노성대 씨=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력했던 분위기였다. 제작거부의 뜻은 정의롭다고 생각했으나 국장 단은 간부로서 이의 실현을 막기 위해 개별기자들 설득에 애썼다.
-증인이 고통을 겪은 직접적 계기가 된 광주학살이 이제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고 명예회복이 거론되는데 대한 감회는.
▲노씨=언론은 모든 권력 정치세력과 금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
새빨간 거짓말을 참말이라고 우기는 거짓언론이 오늘의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장본인이란 점에서 모든 언론인은 자성하고 거듭나야한다.
◇손주환 의원(민주) 신문
-기자협회 보가 등록·취소된 이유는.
▲김동수 씨=창비와 함께 취소됐다. 맘대로 취소시켰던 것 아니냐.
-80년7월말∼8월초 언론인 강제 해직기준에 대해 들은바 있는가.
▲김근 씨=당시 떠돌던 얘기는 79년에서 80년까지 자유언론운동에 헌신했던 기자와 부정·비리관련기자를 해직시킨다는 설이 돌았다.
-언론대량 숙청을 단행한 이유를 뭐라고 보는가.
▲김근 씨=당시 집권 기도했던 소수 정치 군부집단이 언론을 손아귀에 넣고자 뼈대있는 기자를 좇아낸 것이다.
◇이상회 의원(민정) 신문
-신문은 정치·경제의 지향성이 있어야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선 사주가 이를 정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경일 씨=동의하지 않는다.
미·구라파선진언론은 소유와 경영, 경영과 편집이 분리돼있다.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사주가 자기지향에 맞는 신문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국민전체를 모두 대변한다는 거창한 모토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
민중을 대변하는 신문도 있어야하면 사용자의 권익도 대변하는 신문도 있어야하는 게 아니냐.
▲김근 씨=자유민주 체제에선 복수주의가 기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언론의 비판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제기할 수 없었던 것 아니냐.
◇박종무 의원(평민) 신문
-노 증인은 MBC로 복직해야한다고 생각하나.
▲노씨=나뿐 아니라 모든 해직 언론인의 공통된 처지다.
-MBC에서 복직된 기자는.
▲노씨=문화방송과 경향신문의 해직자 2백19명 중 겨우 8명이다.
-당시 MBC는 왜곡이 심했는데.
▲노씨=그렇다.
-보도국부국장으로서 느낌은.
▲노씨=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 지역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며칠간 보도 금지되고 있었고 사실보도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결의문 초안이 문제된 이유는.
▲김동수 씨=각사 기자들이 검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기협분 회장들이 계엄검열 철폐, 일선 기자의 민주화 동참, 유신치욕 청산, 동아·조선해직기자 복직 등을 결의했고 이걸 문안으로 만들었다.
-80년 동아일보 해직자는 일부 복직됐는데.
▲김근 씨=나도 작년에 복직을 통고 받았으나 내 동료 중 통고 받지 않은 사람도 있고 복직조건이 해직기간을 경력으로 인정 않는 것이었다.
◇조세형 의원(평민) 신문
-청문회 활동결과 6백35명 정도는 당국의 명단에 없는 사람이 해직된 걸로 드러나고 있는데.
▲김동선 씨=여러 가지로 조사해보니 보안사에서 보낸 명단에 사주가 미운 사람을 더 추가한 게 사실이다.
-현재 복직현황은.
▲김동선 씨=해직기자 7백17명 중 70명 정도다.
-언론이 좋아지고 있는 게 6·29이후라고 했는데 6·29때문이 아니라 국민의 6월 혁명 때문 아닌가.
▲김동선 씨=동감이다. 시점을 말한 것이다.
-7명이 지목 돼 잡혀간 건 내부 밀고자가 있기 때문 아닌가.
▲이경일 씨=관계기관에서 출입은 했어도 다 파악하긴 어려웠을 거다. 내 느낌으로는 편집국 내 어떤 분이건 편집국 밖의 어떤 분이 밀고한 것 같다.
◇백남치 의원(민주)신문
-당시 동아일보에 보리밭 서클이라고 있었다는데.
▲김근 씨=그렇다. 보리밭이란. 기자들이 자주 출입하던 음식점 이름이었다.
-그 서클 회원증 대부분이 해직되었다는데.
▲김근 씨=그렇다.
-(이경일 씨에게) 증인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무죄가 되었다는데.
▲이씨 80년 6월9일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고려연방제에 대한 찬양발언을 시인하라는 등 비논리적인 협의를 추궁했다. 심한 구타를 당했고 칠성 판에 뉘어져 물 고문을 당했다.
생명에 위험을 느끼고 가족들이 걱정돼 진실은 재판정에서 밝히리라 생각하고 지장을 찍어주었다. 읽었던 용공서적을 대라고 해 전 유고 대통령「티토」의 보좌관이 쓴 「일당독재」라는 책을 써주었더니 나중에 무죄가 되었다.
-(김동선 씨에게) 5공의 언론탄압 최고책임자는 누구라고 생각되나.
▲김동수 씨=허문도씨가 통폐합 만 관련됐다고 주장하나 언론인해직까지 포함한 모든 비리가 그 사람에게서 비롯됐다는 심증을 갖고있다.
◇강삼재 의원(민주) 신문
-80년7월4일 계엄사 발표를 보면 MBC·경향신문기자들이 김대중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돼 있다가 나중 공소장을 보면 그 부분은 빠졌다. 어떻게 된 건가.
▲노씨=조사중엔 김대중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한 조작·날조작태로 전두환 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했다.
▲이씨=6월9일 연행됐을 때 수사관이 쪽지를 보며 「고려연방제」등을 집요하게 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날자 석간에 이미 그러한 내용이 실려있더라.

<4면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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