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빗나간 중화학 투자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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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문제의 중화학투자 조정은 이미 3공 시대부터 이월되어 왔던 골칫거리였다. 두 차례에 걸쳐 중화학투자 조정을 시도했으나 극심한 불황 속에 어느 것 하나 만신창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보위가 메스를 들고나선 것이다. 수술의 방향은 대상업체를 통폐합하여 일원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처방에 대해 당시 관심의 초점은 자동차와 발전실비를 둘러싼 현대와 대우의 대립이었다.
자동차업계는 연간 1만대나 팔릴까 말까한 극심한 불황 속에서 모두가 수백억원씩의 적자를 내고 있었고 현대양행은 하루 이자만 해도 1억원씩 쌓여갔다.
앞은 캄캄하고 진단과 처방은 각양각색이었다. 자동차의 경우 김재익 경과위원장은 시종일관 『자동차산업은 우리 경제여건에 맞지 않으니 차제에 아예 한 개 정도만 남겨서 외국 메이커의 조립생산이나 하도록 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맞선 차수명 상공분과위원은 유망산업임을 끝까지 주장하는 등 국보위 안에서조차 초기에는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서석준 기획원 차관은 『물리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느냐. 가만히 놔둬도 정리가 될텐데』라고 통폐합 자체를 반대하기도 했다.
더구나 업계의 이해가 엇갈리는 문체라 쉽사리 조정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3개월이라는 시한부 정치일정에 묶여있는 국보위로서는 어떻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신병현 상공장관은 하는 수 없이 김우중 대우 회장과 정주영 현대 회장을 장관실로 불러 최후 통첩을 했으나 정 회장은 끝내 단일화 반대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신 장관은 이 자리에서 『정 그렇다면 할 수 없다. 갈 때까지 가다가 쓰러지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자유경쟁원리를 배제할 생각은 없다』며 정부의 불간섭을 선언했으나 그것은 그의 생각이었고 국보위의 입장은 달랐다. 결국 절차나 합법성보다는 당위성을 앞세워 밀어붙인 것이다.
8월 1일 상공장관 회의실에서 정·김 양씨를 참석시킨 가운데 진행된 국보위 상공분과 위원회의 내용이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신병현 상공 장관=오늘 대체로 매듭을 짓도록 하자.
▲정주영 현대 회장=자동차를 수출산업으로 육성하자는 데는 찬성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부 작업이 어느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했다는 인상이 강해 성과가 의문이다. 경쟁체제만이 불경기를 극복할 수 있다.
▲김우중 대우 회장=대우를 겨냥하는 말 같은데 맹세코 말하지만 나는 남의 기업 인수를 희망한 일이 없다.
▲신 장관=경쟁원칙에는 이론이 없다. 더구나 특정인에게 혜택을 줄 생각도 없다. 그러나 지금 경제형편에서는 경쟁도 못하지 않는가.
▲정 회장=불경기 때만 경쟁을 시한부로 중지하면 어떠냐. 그러나 자동차는 따로 다루어 달라. 현대와 대우에 정부가 나눠준다는 인상은 주지 않아야 한다.
▲김 회장=옥포조선도 어쩔 수없이 인수했다. 쓰다고 뱉고 달다고 삼키는 식으로 기업경영 안 했다.
▲신 장관=석연치 않으나 이대로 방치할 순 없다. 기업들이 은행돈 없이 했다면 두말 않겠다.
▲정 회장=투자조정 원칙에는 찬성하나 특정인 두고 하지 말라. 장관이 알고 다루어야 한다. 자동차 산업은 나라경제의 핵심이다. 장관 자신도 모른다고 자백하면서 따라오라고 하면 따라갈 수 없다.
▲신 장관(벌컥 화를 내면서)=말꼬리를 잡지 말라. 우리 실무자가 1년간 연구한 것이다.
▲정회장=따를 수 없다. 시간을 달라.
▲김재익 경과위원장=투자조정문제가 빨리 해결 안 되면 문제가 커진다. 다른 일도 안 된다.
▲차수명 위원=업계의견을 충분히 반영시키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이 부문(중화학)에 대한 정책금융·지시금융이 전체 은행돈의 80%나 된다. 조속히 합리화·전문화하지 않으면 중소기업들이 다 죽는다.
▲오명 위원=실망이 크다. 두 총수님의 이야기는 기대 밖이다. 검토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윗분의 결정사항이다. 전부 국가 것이 아닌가. 사업자체가 내 것 네 것이냐는 문제 밖이다.
▲서석준 기획원 차관=중복투자와 조정은 어떤 형태로든 정비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로는 해결 안 된다.
▲신 장관=지체할 수도,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두 총수가 국가적 차원에서 임해달라. 기본원칙에는 양쪽 다 찬성했으니 곧 회의를 재 소집하겠다.
▲정 회장=시간을 넉넉히 달라. 경제는 개인기업의 의사를 존중해 달라. 2주일 정도 여유를 달라.
▲금진호 상공위원장=결심에 필요한 시간만 남지 않았느냐. 국보위의 배경을 이해해 달라. 결론을 늦출 수 없다. 큰 줄거리라도 결정하자.
▲정 회장=자동차는 GM과의 문제를 선결해야 한다. 수출하려면 외국의 대기업이 개입해선 안 된다. 경쟁원칙도 중요하지만 전문화의 희생을 극소화해야 한다. 일원화보다 전문화가 바람직하다.
▲김 회장=특혜의 오해를 받느니 차라리 대우가 자동차를 안 해도 좋다. 제3의 회사를 선정해도 무방하다.
▲서 차관=그건 안 된다.
▲신 장관=1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8월 20일 국보위의 중화학투자 조정안이 발표되었고 그 후 얼마동안 추진되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대로 된 것은 거의 없었다.
당시 국보위의 분위기가 경제분야에까지도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전이 한중에 대한 발주방식을 결정하기 위해 이기백 운영분과위원장 주재(원래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주재할 예정이었음)로 회의가 열렸었다. 이 회의에는 기술문제가 걸려있다고 해서 공병출신인 안무혁 건설분과위원장이 특별히 참석했다.
김영준 당시 한전 사장이 『한전으로서는 감리 능력이 없기 때문에 턴키베이스로 한중에 발전소 건설을 넘기기 곤란하다』고 말하자 안무혁 위원장은 고함을 지르며 『한전이 지금까지 발전소를 몇 개나 건설해 왔는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 직무유기를 해온 것 아니냐』며 다그쳤다.
김 사장은 겁에 질려 『그렇게 말씀하시면 몸둘 바를 모르겠읍니다』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참석한 경제 차관들도 누구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결국 안씨의 주장대로 턴키방식으로 결론을 냈지만 이것 역시 백지화되고 말았다. <특별 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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