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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생각은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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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근 밝혀진 요코타 메구미.김영남 등 납북 학생과 얼마 전 타계한 신상옥 감독. 이들은 그동안 남북한의 본질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소리 없는 전쟁'(Silent Warfare)이었다. 반인륜적 범죄도 서슴없이 자행되던 상황이었다. 북한은 남한 적화를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랑군(양곤) 폭탄테러와 대한항공 폭파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많은 간첩을 남파시켰고, 남한 전역에서 혁명역량 구축을 위해 광분했다. 이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국정원 해체를 끈질기게 외치고 시도했다. 우리 정부도 국정원을 중심으로 군.검찰.경찰의 수많은 대공.공안 요원이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몸을 던져 일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북한의 대남공작 활동은 통일운동으로 미화되고, 체제 위해(危害)세력은 물론 간첩들도 통일운동가로 포장돼 힘을 얻고 있다. 반면 간첩을 잡거나 대비하는 일은 애국이 아니라 냉전적 반통일 행위로 여겨지게 됐다.

최근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피랍자들의 인간 스토리나 송환을 위한 인도적 측면만 강조되고 있다. 왜 북한이 납치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간과되고 있다. 북한이 국가 목적을 위해 납치.마약.밀매.위폐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한 '소리 없는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국력이 압도적 우위에 있더라도 이 점을 경시해선 안 된다.

북한은 6.15 선언 이후 한국으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남북교류 공간과 인터넷을 활용한 통일전선 공작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의 대남공작지도부는 지금을 대남혁명 호기로 보고 있다고 한다. 이런데도 최근 대공수사권 폐지를 골자로 한 열린우리당의 국정원 개혁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인권 탄압과 권력 남용의 과거 전력 때문이라고 한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은 대통령이 총괄 운영하므로 국정원의 역사는 그 시대의 대통령과 안보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확립된 지금 국정원의 폐지논리로 과거 인권 탄압 등을 제기하는 것은 국정원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자인하는 것이다. 광주사태에 군이 투입됐다고 국군을 폐지하자는 논리와 같다.

언제까지 과거지향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는가. 국정원은 불법도청을 고백할 정도로 뼈아픈 자성을 했다. 정치환경도 근본적으로 변했다. 국정원 대공수사권 문제는 단순한 수사 주체에 관한 행정적.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전반적인 방첩.보안 체계와 직결된다.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는 이 체계의 핵심인 국정원의 기능과 전반적인 시스템 약화를 초래한다. 이는 북한이 바라는 것이다. 이번 납치문제를 계기로 남북관계에는 대결적 현실이 엄존함을 교훈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이번 국정원 개혁안에 대한 국회 논의가 우리의 안보체계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길 바란다.

이병호 전 안기부 차장·울산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