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포 책임소재 여전히 미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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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윤흥정 전 전남북 계엄분소장에 대한 증인신문을 한 7일의 광주청문회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엄청나게 악화시킨 발포과정과 명령 책임자, 형식. 내용상의 지휘체계, 그리고 정씨의 당시 역할 등이 초점으로 모아졌다.
『12·12를 주도한 사람들과 시각을 같이해 협력해왔다』고 공언한 정씨와『원치 않는 입각 요구에 마지못해 옷을 벗었다』는 윤씨의 증언은 핵심에 이를수록 논점과 주장이 상반돼 「합치된」사실로서의 진상규명에는 미흡한 감이 짙다. 그러나 그 점이 오히려 국민들로 하여금 객관적 사실을 추론케 하는데 기여한 측면도 없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발포명령의 책임 소재는 이 날로 명쾌한 해결을 못한 채 숙제로 남게됐다. 그러나 발포과정과 현지 공수부대의 「사전발폰 행위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5월21일 오후7시30분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의 자위권보유천명이 있기 전 △2O일 오후11시 광주신 역과 △20일 오후1시30분 도청 앞에서의 사전발포가 있었다는 야당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의 정당방위 성립 여부와는 별도로 계엄사의 자위권 천명이 사전발포당위에 대한 사후 조치적 성격을 띤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몰고 올 소지도 없지 않다.
정씨는 이날 현지 부대의 발포에 대해 『보초와 초범은 외부의 위해가 가해질 경우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정당방위 등의 법적 근거를 제시한 뒤 「지휘권 밖에 있던」자신과의 무관함을 강조했다. 반면 윤씨는 문제의 5월21일 상황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관련 부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윤씨는 『5월21일 정오쯤 31사단의 61훈련단장인 한일수 장군이 창평의 예비군훈련소에 시위군중들이 차를 타고 와 총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총을 쏘지 않고는 뺏기게 생겼으니 총을 쓰게 해달라고 건의해 총을 쏘지 말라고 했으나 한 장군은 답답한 나머지 참모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발포를 건의했고 당시엔 총장도 발포치 말라고 했으나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것으로 안다』고 말해 자신이 파악한 한도 내에서나마 자외권 보유천명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윤씨 또한 그 엄청난 사태의 현지 사령관이었음에도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부분에 대해선 『보고 방지 못했다』는 모호한 말로 답변해 증언의 신뢰성 문제를 제기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날 역시 발포의 적법성과 연관된 정당방위 성립여부는 두 증인과 여야의 팽팽한 대립 속에 해결을 알지 못해 다음 과제로 넘겨졌다.
다음으로 정씨조차 과잉 진압을 인정한 특전사의 지휘권을 누가 행사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신문에 임하는 야당 의원들과 정씨의 주장은 상반됐다.
정씨는 군의 내규 등을 들어 『휘하부대를 타 부대에 배속시키면 원 부대장의 지휘권은 없다』며 당시의 지휘체계를 육본-2군사령부-전교사-31사단으로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씨는 야당의원들의 집요한 질문에 『광주에서 22일까지는 상황을 잘 몰라 충고나 조언을 하지 못했으나 22일부터는 소준열 사령관(윤씨 후임)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고 토로했다.
윤씨는 『공수부대의 지휘권은 31사단장이 갖는 것은 상식』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분소장에 있을 당시인 5월20일 정씨가 진압 등에 관해 조언한 것으로 안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윤씨는 현지 계엄분소장으로서 상부에 증원을 요청한 바도 없고 자신의 책임 하에 사태해결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독자판단이나 재량권이 부여되지 않는 명령형 명령만 하달됐고 도청발포 후 상황 등 마땅히 보고 받아야 할 상황도 보고 받지 못했다고 증언, 당시 지휘체계에서 소외됐다는 불만을 토로했으나 현지 사령관으로서의 무책임 감을 스스로 드러냈다는 비난도 면할 수 없게됐다.
윤씨는 특히 18일의 과격 진압상황도 정식지휘계통의 보고가 아닌 시민 등 친지의 전화연락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해 당시 지휘권과 보고체제의 2원화 현상을 암시했다.
이해찬(평민)·이인제(민주)의원 등도 당시 지휘체계는 명목상의 체계와는 달리 현지보안부대를 매개로 보안사-특전사-공수3개 여단-20사단으로 형성됐고 작전계획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작전 집행은 정씨가 맡아 진압작전을 전개했다고 추궁했으나 이를 입증하는데는 실패했다.
따라서 청문회를 거듭 할수록 상당 부분 윤곽이 드러나고 있으나 △「사전 발포」의 책임소재 △특히 공수여단에 대한 실제 지휘권행사 등에 대한 명확한 진실규명은 여전히 미결로 남아있어 전 전대통령의 증언과 당시 관련자들의 대질신문, 현장조사 등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고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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