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부동산 대책에 대한 아줌마들의 집단 반발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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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파트값이 급등한 곳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집값을 끌어올리기 위한 주민들의 조직적인 담합이다. 개별 단지 부녀회 등이 아파트를 싸게 팔지 못하도록 중개업소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고전적 수법이 됐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범 신도시 차원의 동호회가 생겨 조직적인 집값 올리기가 확산되고 있다. 터무니없는 정보를 흘리는 휴대전화 메시지도 난무한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8.31 및 3.30 대책 등 각종 부동산 대책이 잇따랐는 데도 불구하고 집값이 잡히지 않는 데는 이 같은 아파트 집단 이기주의도 한몫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에서는 온갖 규제를 내세워 집값을 잡으려는 정부 정책에 '아줌마'들이 저항하는 분위기로도 해석한다.

유엔알 컨설팅 박상언 대표는 "집값 잡기용 대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주민들이 직접 호가 올리기에 나서면 약발이 먹히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 대형 건설회사 임원은 "담합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시장에서 저절로 생기는 이 같은 현상을 예상하지 못하고 부동산 대책 마련에만 매달리는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 확산하는 '아파트값 올리기'=이제까지는 주로 강남권 아파트 단지 부녀회가 '제값 받기' 목소리를 높였지만 요즘은 지역이 확대되는 특징이 있다. 한동안 집값 상승에서 비켜난 곳이나 작으나마 개발 재료가 있는 곳 등에서 담합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난 3월 말 한 유명 포털사이트엔 '산본 ○○○네트워크'라는 카페가 생겼다. 산본 신도시 일부 주민이 만든 아파트 제값받기 동호회로 회원 수만 14일 현재 1800여 명에 이른다. 이곳에선 '저평가된 아파트값을 바로잡자'는 홍보물을 제작해 아파트 입구 게시판이나 엘리베이터에 붙이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파트값을 잘 쳐주는 추천 중개업소와 미끼.저가 매물을 올리는 비추천 중개업소 명단을 올려놓았다. "산본은 지금 대세상승기 초입" "평촌 ○○평형이 ○○억원이랍니다. 산본 분들 기분이 어떠신지요"등 집값을 자극하는 글도 올라 있다. 산본 A중개업소 사장은 "회원들이 '아파트 시세가 왜 낮느냐'며 항의해 호가를 올려놓은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활동' 때문인지 산본 아파트값은 이달 들어 6.5%나 껑충 뛰어 수도권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 사이트에는 지난달 부천 중동과 상동 주민이 결성한 '○○○ 주민 연합회'도 등장했다. 회원 수는 1600여 명에 이른다. 회원들은 아파트의 적정 시세를 올리는 한편 허위 매물을 게재하는 중개업소에 시정을 요구하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사는 김모(43)씨는 최근 발신처를 알 수 없는 휴대전화 메신저를 받았다. '연내 목동아파트 20평형이 8억, 27평형이 12억원으로 오를 테니 그 이하로 팔지 마라'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 누가 매물을 내놓겠느냐"고 말했다. 신정동 B중개업소 사장은 "일부 주민이 집값을 부추기기 위해 헛정보를 퍼뜨리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제2자유로 노선 확정, 한류우드 조성으로 집값이 꿈틀거리는 일산에서도 담합이 극성을 부린다. 일산 C부동산 관계자는 "팔 계획도 없으면서 시세보다 1억원 이상 올려놓는 '가짜매물' 수법도 있다"며 "이러다 보니 다른 주인들도 덩달아 올려 호가가 상향 조정되기 일쑤"라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 사당동.강서구 화곡동 일대에서도 부녀회 등의 가격 담합에 중개업소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사당동 한 중개업자는 "부녀 단체가 앞으로 한 번만 더 낮은 가격으로 거래할 경우 문을 닫게 하겠다고 해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 "대책 왜 안 먹히나 했더니"=이 같은 현상은 결국 아파트값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려 시장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건설산업전략연구소 김선덕 소장은 "집값 상승기의 담합은 주택시장에서 매물 공급을 막아 정상 시세보다 아파트값이 부풀려지는 부작용을 낳는다"고 말했다.

담합이 지역적으로 확산하면 아무리 규제가 강한 대책이 나와도 부동산 시장 안정은 어렵게 마련이다. 산본에 사는 서모씨는 한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정부가 3.30 대책을 내놓자 주민들이 '재산권을 지킨다'며 매물을 모두 거둬들이는 바람에 산본의 40평형대 아파트가 최근 한 달 만에 1억원 이상 호가가 올랐다"며 "강도 높은 부동산 정책의 약발이 잘 먹히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었던 게 아니냐"고 말했다.

어쨌든 집값 올리기는 세입자 등 실수요자의 피해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평촌신도시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이모(35)씨는 "자녀 학교 문제 때문에 이왕이면 이곳에서 집을 사려고 했는데 집값이 너무 올라 엄두가 안 난다"고 말했다.

주민 담합에 대한 규제는 쉽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공정거래법상 담합 판단은 영리를 목적으로 한 사업자만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부녀회나 모임 등은 단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건설교통부 관계자는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가급적 해당 단지에서 멀리 떨어진 중개업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박원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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