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폭력사태'시위대·경찰 모두 잘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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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영농 행위와 시위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군이 설치한 철조망이 평택시 팽성읍 일대 농경지를 가로지르고 있다. [연합뉴스]

한명숙 국무총리가 12일 오전 10시 '국민께 드리는 호소의 말씀'을 발표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에 대해서다. 그는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을 위해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또 "지난번과 같은 충돌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핵심은 "모두 한 걸음씩 물러나 냉정을 되찾자"는 것이다.

하지만 한 총리는 불법시위와 폭력행위를 '시위대와 경찰의 물리적 충돌'이라고 표현했다. 양쪽 다 잘못했다는 의미다.

호소문에선 시위대에 우호적인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정부가 잘못했음을 암시하는 표현도 눈에 띈다. 반면 명령에 따라 시위대를 저지하다 폭행당하고 입원한 경찰과 군인들에 대해선 유감이나 위로의 말이 없다. 이에 대해 "공권력을 수호해야 할 국무총리가 오히려 공권력의 권위를 실추시켰다"(인천대 조전혁 교수)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한 총리의 호소문은 이날 두 번 수정됐다. 오전 9시에 나온 초안에선 시위대를 일방적으로 달래는 표현이 많았다. 낮 12시30분 배포된 최종본에선 그런 표현이 많이 빠졌다.

◆ "공권력 권위 실추시켰다"=국무총리 비서실은 오전 9시 한 총리의 발표문 초안을 기자실에 돌렸다. 초안에선 "시위대와 경찰, 정부당국…이 모든 당사자가 한 걸음 물러나 냉정을 되찾자"고 돼 있다. 경찰과 정부가 냉정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이 표현은 최종본에선 "모두 한 걸음 물러나 냉정을 되찾자"로 바뀌었다.

초안에는 "정부당국도 대화가 부족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열린 자세로 성의를 다해 주민들과 해결방법을 찾겠다"는 표현이 있었다. 정부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하지만 1차 수정본과 최종본에서는 '정부도 열린 자세로 해결방법을 찾겠다'는 식으로 달라졌다.

또 다른 논란은 '주민들의 이유 있는 저항과 절규'라는 표현이다. 수정본과 최종본에선 '저항과 절규' 대신 '항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역시 시위대를 막은 공권력은 부당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초안에서는 "매 맞는 시위대, 매 맞는 경찰이 없게 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공권력과 시위대의 물리력(폭력)을 동일 선상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 표현은 수정본에서부터는 전면 삭제됐다. 총리실은 한 총리가 초안에 있는 문구 일부를 빼고 발표하자 뒤늦게 두 차례나 발표문을 수정해 배포했다.

◆ "이라크에 간 아들보다 더 걱정된다"=한 총리의 발표문에 대해 전.의경 부모들은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아들이 전경으로 평택에 가 있다는 김영복씨는 "큰아들이 군인으로 이라크에 파병됐었는데 이라크보다 평택에 간 둘째 아들이 더 걱정된다"면서 "공권력을 무력화해 나라 꼴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고 말했다.

중앙대 법대 제성호 교수는 "국회 인준까지 받은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며 폭력을 동원한 시위대를 비호하는 듯한 한 총리의 발언은 극히 유감스럽다"며 "대화와 타협도 중요하지만 어설픈 양비양시론으로는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시민연대는 이날 "종교지도자라면 모를까 한 나라의 국정을 이끄는 총리가 군경과 폭도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성명을 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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