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넓고 깊은 전설·신화 한국인 '삶의 행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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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한국인의 자서전
김열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78쪽, 1만2000원

"토머스 불핀치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면, 한국 신화의 열쇠는 김열규 교수에게 있다." '한국인의 자서전'에 실린 소설가 이청준씨의 추천사다. '한국인은 누구인가'를 화두 삼아 일평생을 국문학과 민속학 연구에 바쳐온 김열규(74) 서강대 명예교수에게 이처럼 걸맞는 평가도 없을 터다. 그는 이 책에서도 한국 신화의 너른 바다를 헤엄쳐간다. 거기에 동참하는 것은 참으로 황홀한 경험이다.

물론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한국인의 신화' 등 전작들을 읽은 이들에게는 동어반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의 장기이기도 한 유려한 문장으로 안내하는 한국 신화의 세계는 참으로 넓고도 깊은 까닭에, 몇 번을 되풀이해 초대받아도 크게 싫증이 나지 않는다.

왜 신화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한 민족공동체 전 구성원의 속내, 즉 웅숭깊은 마음속"을 들여다봄으로써 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설이나 신화는 "주어진 시대의 최고의 이데아를 담고 있으므로" 그 시절 그 사람들이 무엇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는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서전'이 '한국인의 (인생) 참고서'로 읽힐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 눈으로 본 한국인의 삶은 "눈물 범벅 땀 범벅된 짠지 인생"이다. 웅녀가 백일 동안 그 독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머니가 되기 위해 겪는 통과의례였다. 피투성이 손으로 단단한 바위에 수도 없이 돌을 부딪쳐야 했던 불임 여성들의 '아기빌이', 난산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산모에게 송장에 입히는 수의나 상복을 둘러씌웠던 풍습, 액땜을 한다고 강보에 싼 젖먹이 아기를 동구 밖에 내다버리는 '바리데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맵고 짠' 우리 조상들의 삶은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몸부림이었다.

특히 저자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졌기에 더더욱 잡초처럼 강인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 신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 설화를 새롭게 해석해 여자아이에 대한 할례가 자행됐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할머니들의 팔자 걸음에서 순하게 견디고 참은 나머지 시나브로 가꿔진 악바리 근성을 엿보는 식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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