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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블릿PC로 승객과 대화” … 청각 장애인이 모는 서울의 1호 택시 타보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6일 오후 서울 강서구에서 한 주황색 법인택시에 올라타자 색다른 경험이 시작됐다. 뒷좌석 앞(조수석 뒷면)에 달린 태블릿 PC에서 ‘목적지를 입력해달라’는 소리가 나왔다. 운전석에 앉은 택시기사는 뒤를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게손가락으로 태블릿 화면에 목적지를 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기사 앞에 설치된 태블릿 화면에도 이 글자가 떴다. 목적지는 키보드로 입력하거나 소리 내 말해도 같은 원리로 기사에게 전달됐다. 화면을 통해 목적지를 확인한 기사는 뒷좌석을 향해 두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 기사는 목적지를 별도의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후 택시를 몰았다.

이 택시의 기사 이대호(50)씨는 청각 장애인이다. 메시지 전송 애플리케이션이 설치된 태블릿이 그와 승객의 ‘대화’를 돕는다. 서울에 청각 장애인이 모는 택시가 처음 등장했다. 모두 2대로 지난 13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또 다른 택시는 역시 청각 장애인인 최철성(47)씨가 운전한다. 이씨와 최씨 모두 서울시의 택시운전자격 시험에 통과했고, 지난 9일 법인 택시회사에 채용됐다. 두 사람은 보청기를 사용해도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 2급이다.

서울시서 첫 택시운전자격 얻은 청각 장애인 #서울 1호 ‘침묵 택시’ 운행 이대호·최철성씨 #앱 개발로 승객과의 소통 장벽 허물어져 #목적지 태블릿에 말하거나 적어 기사에 전송 # “승객의 마음에 귀 기울여 서비스 하고파”

현행법에 따라 청각장애인이 운전면허 시험(제1종 대형·특수 운전면허 제외)과 운전적성정밀검사를 통과하고, 택시운전자격을 얻는 데는 제한이 없다. 운전면허 시험을 주관하는 도로교통공단의 명묘희 책임연구원은 “과거 실험 결과 청각 장애인은 주행 상황 변화에 따른 속도 편차 등에 있어서 일반인과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청각 장애인이 택시 운전을 하는데 안전 문제는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청각 장애인 택시기사 최철성씨가 지난 16일 택시에서 뒷좌석을 향해 미소짓고 있다. 승객은 택시 안에 설치된 태블릿 PC를 통해 기사에게 목적지를 전달할 수 있다. 우상조 기자

청각 장애인 택시기사 최철성씨가 지난 16일 택시에서 뒷좌석을 향해 미소짓고 있다. 승객은 택시 안에 설치된 태블릿 PC를 통해 기사에게 목적지를 전달할 수 있다. 우상조 기자

그런데도 이전까지 ‘청각 장애인 택시기사’를 볼 수 없었던 건 승객과의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청각 장애인이 서울시의 택시운전자격을 얻은 전례가 없었다. 승객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보니 택시회사로부터 채용 자체가 불투명한 게 이유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이 만든 기술이 ‘소통 장벽’을 허물었다. 벤처기업 코액터스는 지난 6월 택시 안 의사소통 애플리케이션 ‘고요한 택시’를 개발했다. 송민표 코액터스 대표(동국대 컴퓨터공학과 4학년)는 “직종이 한정돼 있는 청각 장애인의 직업군을 넓히고 싶었다”고 말했다. 코액터스는 청각 장애인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집해 택시운전자격 취득을 돕고, 계약을 맺은 택시회사들에 취업을 주선한다. 이씨와 최씨를 채용한 택시회사 신신기업의 심상홍 대표는 “기술로 승객을 상대하는 서비스 문제가 해결됐으니 청각 장애인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북 경주시에선 이미 6월에 같은 기술을 이용해 청각 장애인이 모는 택시 한 대가 등장했다.

서울의 1호 청각 장애인 택시기사 이대호씨(왼쪽)와 최철성씨. 최씨가 손에 든 태블릿이 승객과의 소통을 돕는다. 우상조 기자

서울의 1호 청각 장애인 택시기사 이대호씨(왼쪽)와 최철성씨. 최씨가 손에 든 태블릿이 승객과의 소통을 돕는다. 우상조 기자

‘청각 장애인 서울 택시 1호’의 주인공이 된 이씨와 최씨는 “택시 운전대를 잡으면서 삶에 희망을 얻게 됐다”고 했다. 서울시농아인협회 강서구수어통역센터의 정점희 수화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인인 최씨는 ‘운송업 2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택배 차량, 패스트푸드 배달 차량 등을 몰았다. 그는 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움직임을 흉내 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최씨는 “택시 운전은 내 오랜 꿈이어서 도전했다”면서 “어렸을 때부터 운전을 좋아해 다양한 운전직에 도전했는데, ‘넌 못 들어서 안 돼’란 말을 듣고 좌절도 여러 번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학생인 두 자녀의 뒷바라지를 위해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3살 때 원인모를 열병을 앓고 난 후 청각 장애를 갖게 됐다.

장애인 운전사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최씨는 택시에서 내려 승객의 무거운 짐을 트렁크에 실어 준다고 한다. “서비스를 받은 승객이 기쁜 표정을 지을 때 마음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이씨는 외국인 승객을 태운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승객이 목적지를 영어로 적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내서 목적지까지 잘 갔다”면서 뿌듯해 했다.

이대호씨(왼쪽)와 최철성씨는 "택시 운전대를 잡은 후에 미래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이대호씨(왼쪽)와 최철성씨는 "택시 운전대를 잡은 후에 미래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하지만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씨는 “내가 청각 장애인이란 사실을 알고 ‘뭐야?’하는 표정을 짓고 문을 쾅 닫고 그냥 내려 버리는 승객도 있었다”며 수화로 ‘마음이 아팠다’를 표현했다.

기자가 타본 이 ‘고요한 택시’에선 과도한 간섭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이 반길 만한 ‘침묵 서비스’가 이뤄졌다. 조용한 가운데 창밖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태블릿에는 ‘카드’와 ‘현금’ 중에서 결제 방식을 선택하게 하는 화면도 떴다.

서울의 복잡한 도로 상황을 감안할 때 안전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간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듣고, 말하지 못하는 대신에 잘 봅니다. 우리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안전하게 운전합니다. 승객의 목소리는 듣지 못해도 마음을 들어서 친절한 서비스를 할 겁니다.”

두 사람에게는 꿈이 생겼다. “운전을 할 때 새가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최씨는 “최소 3년간 무사고로 법인택시를 몰아 개인택시 취득 자격을 얻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많은 승객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넓은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을 느낀다. 운전대를 오래 오래 잡고 싶다”고 했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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