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왜 내게는 묻고 안희정에겐 안 묻나”…재판부 정면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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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왼쪽) 전 충남지사와 피해자 김지은씨. [중앙포토]

안희정(왼쪽) 전 충남지사와 피해자 김지은씨. [중앙포토]

안희정(51) 전 충남지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전 충남도 정무비서 김지은(33)씨가 “판사는 증거를 확인했나. 듣지 않고 확인하지 않을 것이면 왜 물었느냐”며 1심 재판부를 규탄했다.

김씨는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에서 정혜선 변호사가 대독한 편지로 선고 이후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김씨는 “살아 내겠다고 했지만 건강이 온전하지 못하다. 지난 3월 이후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14일(선고일) 이후에는 여러 차례 슬픔과 분노에 휩쓸렸다”며 “‘죽어야 제대로 된 미투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야 할까’라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운을 뗐다.

또 “저는 그날 안희정에게 물리적 폭력과 성적 폭력을 당했다. 그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거절을 분명히 표시했다. 그날 직장에서 잘릴 것 같아 도망치지 못했다”며 “그날 일을 망치지 않으려고 티 내지 않고 업무를 했다. 그날 안희정의 ‘미안하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을 믿었다. 그날 안희정의 범죄들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진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를 향해 “제 목소리 들으셨나. 당신들이 한 질문에 답한 제 답변 들으셨나. 검찰이 재차·3차 검증하고 확인한 증거들 읽어보셨나. 듣지 않고 확인하지 않을 거면서 제게 왜 물으셨나”라고 물었다.

이어 “안희정에게는 왜 김지은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그렇게 여러 차례 농락했나 물으셨나. 왜 페이스북에 ‘합의에 의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썼느냐고 물으셨나. 왜 검찰 출두 직후 자신의 휴대전화를 파기했느냐고 물으셨나”라고 했다.

김씨는 “왜 내게는 묻고 가해자에게는 묻지 않나”라며 “가해자의 증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낸 증거는 다 들으면서 왜 저의 이야기나 어렵게 진실을 말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제 제게 또 무슨 질문을 하실 건가. 제가 또 무슨 답변을 해야 하나”라고 되물은 뒤 “이제 제가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결을 해줄 판사님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여러분이 권력자와 상사에게 받는 그 위력과 폭력, 제가 당한 것과 같다”며 “판사님들은 ‘성폭력만은 다르다’고 하신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그 폭력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했다.

그는 “위력은 있지만, 위력은 아니다. 원치 않은 성관계는 있었지만 성폭력은 아니다. 뭐가 아니라는 것인가. 바로잡을 때까지 살아내겠다”며 “강한 저들의 힘 앞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관심밖에 없다. 바로잡을 때까지 이 악물고 살아 내겠다.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 11부(부장 조병구)는 지난 14일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가 피고인의 성적 제안에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했고 내심 반하는 심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우리 성폭력 범죄 처벌 체계에서는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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