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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속도인가 양인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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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호 20면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30>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떻게 살 것인가

소비에트 화가 스타니슬라프 코센코프가 그린 40장의 『죄와 벌』일러스트 중 라스콜리니코프와 전당포 노파

소비에트 화가 스타니슬라프 코센코프가 그린 40장의 『죄와 벌』일러스트 중 라스콜리니코프와 전당포 노파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푼돈 벌이일 뿐이야. 동전 나부랭이 가지고 뭘 할 수 있겠어?”
“학생은, 그럼, 단번에 큰 돈을 벌어보겠다는 거유?”
“그래, 단번에 한밑천 잡아야지.”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일 셰먀킨의 아방가르드풍 일러스트(1965). 라스콜리니코프와 전당포 노파에게 시간은 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하일 셰먀킨의 아방가르드풍 일러스트(1965). 라스콜리니코프와 전당포 노파에게 시간은 각기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소설 『죄와 벌』 도입부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하숙집 하녀와 주고받는 대화다.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가서 가정교사라도 하라는 하녀의 잔소리에 주인공은 허세로 응수한다. 백수 휴학생이 흔히 경험할 만한 일상적인 대화의 한 토막이지만, 시간에 대한 저자의 사색을 예고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대문호들은 으레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탐색한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삶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엮어진다. 한 인간이 선택한 삶의 모습은 그가 시간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시간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재단해주는 철학적인 척도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의 작업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숫자다. 시간은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관계다.” 너무 심오해서 멀리하고 싶어지는 문장들이다. 다행히 소설에 이런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저자의 시간 철학을 ‘보여준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이 ‘시간 범죄’인 이유

날과 달, 분과 초로 계산되는 시간은 이를테면 ‘생로병사’의 시간이다. 앞으로만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 인간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움직이는 소리는 시간의 행진을 감각적으로 재현한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에게 행진의 끝은 죽음이다.

관련된 속담이나 비유가 말해주듯 생로병사의 시간은 속도와 양으로 계량화된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은 속도를 말해주고 “황금”에 비유되는 시간은 제한된 양을 말해준다. 속도와 양은 각기 다른 개념이라기보다는 일회적인 삶의 두 얼굴이다. 인생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남은 시간은 언제나 너무 적다.

『죄와 벌』의 인물들은 모두 흘러가는 시간을 첨예하게 의식한다. 그들의 다양한 시간 체험은 제각각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 연구자의 지적처럼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가장 깊은 심리적 차원에서 “시간 범죄”다. “삶은 내게 단 한 번만 주어질 뿐, 그 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자각이 살인을 부추긴다.

너무 빨리 가는 시간 때문에 그는 안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동전 나부랭이”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늙은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고 사랑하는 누이동생이 팔려가듯 결혼하는 것을 막으려면 “단번에 한밑천”잡아야 한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조금씩 조금씩 ‘스펙’을 쌓는 일은 그의 성향이 아니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단번에”와 “빨리”는 그의 생각과 말 속에서 강박적으로 울려 퍼진다. “어떻게 하느냐고? 부숴야 할 것은 단번에 때려 부숴 버려야 해. 그러면 돼.”

라스콜리니코프의 “단번에”는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 방식이 아니라 시간에 대응하는 특정 방식이다. “단번에”노파를 살해했지만 살인 후 그는 또 다른 조급증에 사로잡힌다. 발각될지 모른다는 초조한 상태를 견딜 수 없어 무의식중에 “빨리” 잡히기만 고대하다가 결국 자수한다. 자수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자살했을 것이다.

돈이건 시간이건 무조건적인 축적은 악(惡)  

라스콜리니코프의 “단번에”와 짝을 이루는 시간 체험은 전당포 노파가 보여주는 점진적인 ‘축적’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시간의 속도에 사로잡혀 있다면 노파는 시간의 양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다를 뿐,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은 ‘생로병사의 시간’대에 속한다. 노파는 한 달에 5부에서 7부까지 이자를 받는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로, 막대한 재산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내핍생활을 한다. 그녀의 시간은 1분 1초가 돈으로 환산된다. 요헨 회리쉬는 “돈의 습득은 시간의 상실을 보충한다”고 했는데, 고리대금이야말로 가장 명료하게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인생에서 빠져나간 한 달은 한 달 치 이자가 되어 차곡차곡 되돌아온다. 축적하는 인간이 점점 더 축적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축적은 긍정적일 수 있는 개념이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게는 악의 일면이다. 그의 사전에서 축적이란 다른 모든 것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돈이던 지식이던 기술이던 오로지 쌓아올리는 것에만 ‘올인’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재산이나 고리대금이 아니라 축적 행위 자체란 얘기다.

열심히 일해서 조금씩 저축하며 부를 일궈나가는 인간은 심지어 고리대금업자라 하더라도 사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반면에 축적에만 투신하는 인간은 예외없이 사악하다. 인생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안중에 없는 축적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 중의 하나이며 궁극적으로 단절과 동의어다. 사방이 꽉 막힌 작은 전당포에 들어앉아 끝없이 돈만 쌓아올리는 노파와 도끼를 휘둘러 인류와의 연결선을 잘라버린 라스콜리니코프는 단절이란 측면에서 닮은꼴이다.

시간 속에서 견디는 법을 터득한 라주미힌

19세기 러시아 화가 표트르 보클렙스키가 그린 행복한 커플 두냐(왼쪽)와 라주미힌

19세기 러시아 화가 표트르 보클렙스키가 그린 행복한 커플 두냐(왼쪽)와 라주미힌

소비에트 영화 ‘죄와 벌’(1969)에서 ‘긍정의 아이콘’ 라주미힌을 연기한 알렉산드 르 파블로프

소비에트 영화 ‘죄와 벌’(1969)에서 ‘긍정의 아이콘’ 라주미힌을 연기한 알렉산드 르 파블로프

라스콜리니코프의 법대 동창인 라주미힌은 이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시간을 체험한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아왔지만 시간과 관련해서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해 놓은 인물이다.

라주미힌은 쾌활하고 선량하며 “단순함 뒤에 깊이와 품위”를 갖춘 미남 청년이다. 건장한 체격에 힘이 장사이며 웬만한 시련이나 어려움은 다 견뎌내는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다.  한겨울에 불 한번 때지 못하고 지내면서도 “추우면 잠이 더 잘 온다”며 너스레를 떨 정도로 낙천적이다. 그 역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돈이 없어 휴학한 상태이지만 “여러 가지 일로 돈벌이를 해서 다부지게 혼자 힘으로 생활한다.”

라주미힌의 모든 긍정적인 자질은 시간을 의식하는 독특한 방식과 연관된다. 그에게는 시계자판 위를 굴러가는 시간의 속도와 양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시간이 있다. 그래서 아등바등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리지 않는다. 때로 멈추기도 하고 뒷걸음치기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그는 소통하고 교류하고 나눌 수 있다. 그에게 “시간은 언제나 충분하다.”

라주미힌이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동창생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선뜻 돈벌이 일감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도 ‘다른 시간’에서 오는 여유 덕분이다. 가정교사 일이 끊기자 그는 출판사 쪽을 뚫어 일감을 얻는다. 독일어로 된 신간서적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인데, 번역료로 인쇄 전지 장당 6루블에 계약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일감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선불과 번역 일감을 나누어준다. 자기는 “철자법이 서투르고 독일어가 시원치 않으니” 도와주면 좋겠다는 게 이유다. 물론 그의 독일어는 완벽하다. 친구가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속 깊은 배려에서 나온 거짓말이다.

뉴욕대 클리거 교수는 라주미힌의 시간을 ‘빌둥’의 시간이라 단언한다. 독일어 ‘빌둥(Bildung)’은 형성·교육·양육을 의미한다. 실제로 라주미힌은 손해도 보고 실수도 하지만,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커리어’를 형성해 나간다. 발품을 팔며 뛰어다닌 결과 “괜찮은 출판물은 대체로 수지가 맞고 때로는 많은 이익을 남긴다”는 결론에 도달해 몇 가지 서적을 머릿속에 찜해둔다. “출판사를 여기저기 뛰어 다닌 지가 벌써 2년이 넘었어요. 속사정을 다 파악했어요.”

그는 시장 분석을 토대로 이른바 ‘청년 스타트업’을 구상하며 장차 부인이자 동업자가 될 두냐에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다. 3, 4년 안에 생활의 기틀을 잡고 토양은 비옥하지만 일손과 자본이 부족한 시베리아로 이주해서 창업한다는 계획이다. “사무일, 인쇄소, 종이, 판매에 관한 모든 일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낱낱이 다 알고 있으니까요!” 현명한 두냐는 라주미힌의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결국 계획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련을 이겨내며 ‘살아있는 과정’을 이루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라주미힌은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행복한 인물이다. 사랑하는 여성과의 결혼은 물론 장래의 물질적인 성공까지도 보장된 듯하다. 도끼를 휘두르지 않아도,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돈만 쌓아올리지 않아도, 그는 지상에서의 행복을 거머쥔다. 그는 강박적으로 시간을 셈하고 생의 유한성을 고통스럽게 의식하는 대신 시간 속에서 견뎌내는 법을 배운다. 배우고 성장하고 무르익고 여물어 간다. “조그맣게 시작해서 크게 확장합시다!” 그의 시간은 성장의 시간이자 희망의 시간이다. 라주미힌이 강조하는 “살아있는 과정”의 삶이야말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문호의 잠정적인 답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라주미힌은 주인공이 아닐까. 왜 그는 인물로서의 ‘포스’가 부족할까. 어쩌면 성장이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 아닐까. 시련을 이겨내며 “살아있는 과정”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기 때문 아닐까. 성장이 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단번에 해결하려고 서두르거나 아니면 축적에 탐닉하는 것이 우리 인간 모두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 아닐까.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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